일러스트 김상민 화백 |
서울에 본사를 둔 대기업에 다니는 이지은씨(38·가명)는 2살 자녀가 직장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다. 그런데 올해부터 인근 계열사 직장 어린이집과 통폐합되면서 혹시나 이용이 어려워질까 고민이 커졌다. 김씨는 “통폐합하면서 어린이집 총 정원이 줄었다”며 “출생아 수는 최근 다시 늘어나 언젠가는 ‘제비뽑기’에 당첨돼야 직장 어린이집에 다닐 수 있는 상황이 올 것 같다”고 했다.
민간·가정 어린이집과 대기업·외국계 기업이 운영하던 직장 어린이집의 폐업이 이어지면서 학부모들이 연말연초마다 새 어린이집을 찾아다니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출생아 수 감소가 어린이집 폐원의 가장 큰 이유지만 일부 기업은 ‘비용 감소’를 우선 순위에 둬 직장 어린이집을 통폐합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기관과 대기업 중심으로 운영되는 직장 어린이집 등의 개방·공유를 늘려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9일 취재를 종합하면 올해 문을 닫는 어린이집은 수도권과 지역을 가리지 않고, 전국 곳곳에서 확인된다. 대전 도마동, 서울 홍제동, 제주 대정동, 경기 파주 운전동, 경기 일산 탄현동, 경기 하남 미사동, 경기 수원 율전동 등 곳곳에서 어린이집이 줄지어 폐원한다. GS칼텍스, 메리츠화재(여의도 사옥) 등도 10년 넘게 운영해온 직장 어린이집을 통합하거나 문을 닫는다.
갑작스러운 폐원으로 인해 새로운 어린이집을 찾아야 하는 학부모들은 고민이 클 수밖에 없다. 매해 11~12월과 1월, 신학기를 앞둔 시기면 맘카페에는 “괜찮은 어린이집은 없는지” 수소문하는 부모들의 문의가 올라온다. 폐원 통보뒤 알아본 다른 어린이집의 긴 대기에 “멘붕(멘털붕괴)이다” “막막하다”는 학부모의 하소연도 이어진다.
일부 학부모들은 어린이집 폐원에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 1000세대가 넘는 경기 용인의 한 아파트 단지에선 임대료 부담을 하지 못한 민간 어린이집이 올해 폐원한다. 어린이집 측이 원아 감소로 단지 내 건물 임대료를 부담하지 못하자 입주자대표회의가 계약종료를 통보한 탓이다. 영유아를 키우는 부모들은 “추가로 임대료를 조정할 여지가 없었던 게 아니었다”며 반발하고 있다.
상당수 학부모가 체감할 만큼 어린이집 감소세는 가파르다. 전국의 어린이집 수는 2023년 2만8954곳이었다. 10년 전인 2013년(4만3770곳)에 비해 33.8%나 감소했다. 개인이 운영하는 가정 어린이집은 지난 10년 사이 절반 정도(2만3632곳→1만692곳)로 줄었다. 민간 어린이집 또한 10곳 중 4곳(39.8%)이 사라졌다. 매해 증가세를 보이던 직장 어린이집도 지난해 2월 1317개에서 같은 해 11월 1307개로 감소했다. 지난해엔 정부서울청사 직장 어린이집마저 2곳을 통폐합해 1곳으로 줄였다.
정부나 운영자 모두 “신생아 수 감소가 어린이집 폐원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한다. 다만 어린이집 폐원의 맥락을 들여다보면 조금 더 복잡한 배경이 있다.
기업의 비용 감소는 선호도가 높은 직장 어린이집 폐원의 요인 중 하나다. GS칼텍스는 13년간 운영해온 직장 어린이집을 올해 계열사인 GS리테일 등과 통폐합한다. 총 정원이 줄고 어린이집 밀도는 높아진다. 표면적 이유는 출생아 수 감소지만 속내는 비용 감소에 있다. GS칼텍스는 내부적으로 어린이집 통폐합이 회사 운영 비용 감소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평가했다. GS칼텍스 내부 게시판엔 지난해 말부터 “최소한 현재 재원 중이거나 입학을 생각 중인 구성원들의 의견 수렴이라도 했어야 했다”, “비용 감축 일변도의 회사 태도에 실망했다”는 등의 글이 달렸다.
어린이집에서 보육과 교육을 동시에 하길 선호하는 분위기도 어린이집 폐원을 가속화하는 요인 중 하나다. 어린이집 폐원은 상대적으로 교육이나 시설 경쟁력을 갖추기 어려운 영세한 민간·가정 어린이집에서 주로 이뤄진다. 최근 어린이집 입학설명회에 다녀온 김지희씨(38·가명)는 “상당수 어린이집은 영어처럼 교육적인 부분이나 체계적인 커리큘럼을 강조했다”며 “시설과 시스템을 갖출 수 있는 대형 어린이집들 위주로 살아남는 것 같다”고 했다.
동네 곳곳에서 운영되던 어린이집 감소의 영향은 연쇄적이다. 폐원한 어린이집 원장들은 교구와 각종 물품을 중고시장에 내다팔고, 직장을 잃은 교사들은 실업급여 수령이 가능한지 곳곳에 문의한다. 폐원으로 빈 공간은 영유아를 위해 다시 쓰이지 않고 상당수는 노인 전용 공간으로 바뀐다. 예를 들어 경남 김해시는 지난해 아파트 단지 내 건물에서 어린이집으로 쓰였던 공간 중 공실인 곳을 6곳 파악했다. 이중 4곳을 경로당, 노인시설로 쓰기로 했다.
정부는 어린이집 폐원이 늘어나자 지난해 정부기관이나 지자체, 공공기관 어린이집을 지역 주민들에게 개방할 것을 요청했다. 지난해부터 출생아 수가 반등하면서 감소세인 어린이집의 공백이 앞으로 더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반영된 조치다.
최근엔 인근 회사와 묶어 직장 어린이집을 운영하는 곳도 적지 않다. 대구혁신도시에선 7개 공공기관과 4개 민간기관이 직장 어린이집을 함께 공유한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은 올해부터 ‘교원&하나투어 공동직장어린이집’을 함께 사용하기로 협약 맺었다. 이 직장 어린이집은 교원 20명, 동국대 5명, 롯데쇼핑 15명, 한국언론재단 5명씩 정원을 배분했다.
다만 여전히 다수의 기업들은 직장 어린이집 개방에 선뜻 나서지 않고 있다. 한 증권업체 관계자는 “사내 복지인데 다른 회사에 직장 어린이집을 공유해야 할 이유를 잘 모르겠다”고 했다. 재정적 여력이 있는 대기업이나 정부기관만이 아니라 인근 중소기업 종사자도 직장 어린이집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탁지영 기자 g0g0@kyunghyang.com, 김원진 기자 one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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