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와 아스파시아의 논쟁’, 니콜라앙드레 몽시오, 1801년. 시비꾼 소크라테스는 모든 계층, 국적, 성별과 토론하며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깨웠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이명석 | 문화비평가
“지옥 간다. 빨갱이들아!” 전철역 입구에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든 노인들이 무지개 깃발을 든 여성들을 향해 소리친다. 나는 대파가 든 장바구니를 앞으로 메고 슬그머니 양쪽 사이로 들어간다. 몸으로 완충 지대를 만든 뒤에는 문자라도 받은 양 휴대전화를 꺼내 본다. 노인들의 목소리가 잦아든다. ‘이놈은 어느 편이야, 왜 안 가고 이러고 있어?’ 캐보고 싶겠지만 언제든 촬영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일반 시민’을 건드리긴 쉽지 않다.
나는 ‘시세권’, 엎어지면 시위대를 만나는 동네에 산다. 팔년 전 탄핵 때는 청와대 옆에 살았는데, 용산으로 이사 오니 대통령실이 옮겨왔다. 새벽 버스를 대여섯시간 달려와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부러워할지 모르지만, 가볍게 산책을 나왔다가 내가 지지하지 않는 쪽의 악 받힌 고함 소리에 갇히는 경우도 많다. 다행히 내겐 변태적 취향이 있는데, 우리 쪽보다는 반대쪽 주장이 항상 궁금하다. 거짓 정보나 궤변일 경우가 대부분이겠지만, 그 꼬린내 나는 디테일과 어처구니없는 논리가 흥미를 끈다.
보통 양측의 대규모 시위대가 자리 잡기 전에 먼저 온 유튜버나 열혈파들이 기 싸움을 하는데, 경찰이 지키고 있으니 멱살은 잡지 못하고 격렬한 말로 서로를 공격한다. 그때 나는 우연히 지나가던 중립 시민인 척 귀를 기울인다. 그러곤 반대파의 주장을 가능한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어떤 대답을 해줄 수 있을까 차분히 고민한다. 촌철의 한마디로 그들을 멕이거나, 예리한 비판으로 설득할 의도는 없다. 이미 굳어버린 과거의 사람들이 아니라, 아직 말랑한 미래의 머리들을 위해 무지의 말과 궤변의 논리들을 수집한다.
지난해 12월3일 밤, 나는 문제의 선포 방송을 듣기 전에 ‘계엄, 독재’ 따위의 단어들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나흘 동안 민주화운동기념관에서 ‘민주주의 빈칸 채우기’라는 강의를 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고민이 많았다. 요즘 청소년들은 ‘쿠데타, 통행금지’ 같은 말엔 하품이나 할 텐데. ‘서울의 봄’ 같은 영화를 예로 들까? 그런데 친구의 전화를 받고 티브이를 틀고선 아연실색했다. 내일 강의 때 옛 남영동 대공분실을 탐방하는데, 그대로 계엄군에게 잡혀 박종철 선배 옆방으로 끌려가는 거 아냐?
다음날 강의는 결국 취소되고, 그다음 날에야 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나는 헛웃음으로 인사했다. “원래 이게 역사책 속의 이야기여야 하는데….” 이어 이틀 전에 벌어진 ‘민주주의 살해 미수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나의 역할은 명탐정 코난이 아니라, 검은 그림자처럼 어디에나 숨어 있으면서 그를 방해하는 범인이었다.
“민주주의의 반대는 ‘독재’라고요? 그런데 독재하면 안 돼요?” 학생들의 눈이 커졌다. 독재는 ‘1+1=2’처럼 당연히 나쁜 것으로 머리에 박혀 있고, ‘의회 독재’ ‘검찰 독재’처럼 서로를 비방할 때 쓰는 말이니까. “우리의 민주공화국 역사는 1백 년이 안 돼요. 그러면 세종대왕이 다스리던 왕정 시대는 부끄러운 건가요?” “어떤 시위대에 중국인이 섞여 있으면 그건 어떻게 봐야 하죠?” 당연히 말도 안 된다고 한다. “그런데 그 중국인이 홍콩 사람이에요. 한국에서 민주화 운동을 배워 중국 공산당에 저항한다면요.”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아테네의 등에(쇠파리)라고 했다. 크고 둔해진 말을 괴롭혀, 계속 움직이며 활력을 유지하는 역할이다. 우리는 반민주의 궤변과 요설을 쓰레기라며 외면만 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왜 그런 말에 이끌릴까? 그 주장의 엑기스를 뽑아내 연한 독침을 만들어, 미리 맞고 내성을 키우도록 해야 한다.
나는 팔년 전의 시위로 청력을 크게 잃고 이명에 시달려왔다. 겨우 적응했나 했는데, 요즘 다시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다. 우리 발밑에 제법 단단히 쌓아 두었다 생각한 민주주의의 안전판이 우수수 무너지고 있다는 두려움에 벌떡 일어난다. 이 위기는 지난 한달에 국한된 일도, 우리나라만의 상황도 아니다. 누군가를 권좌에서 내리고 감옥에 보낸다고 끝나지도 않을 것이다. 어쩌겠나, 벽돌 하나씩 다시 세우는 수밖에. 더 자주 토론하고 대련하며 민주주의의 근육을 키워 나가자.
▶▶실시간 뉴스, ‘한겨레 텔레그램 뉴스봇’과 함께!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