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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9 (목)

윤석열이 음모론에 올라탄 이유 [세상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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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김준일 | 시사평론가



왜 윤석열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선포했을까. 계엄에 깊숙이 참여했던 인물들의 증언과 공소장 내용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우리 사회 곳곳에 암약하고 있는 종북주사파를 비롯한 반국가세력들을 정리하지 않고는 대한민국의 미래가 없다’는 취지로 주변에 종종 얘기했다고 한다. 이게 전부일까.



역사학자 리처드 호프스태터는 1964년 ‘미국 정치의 피해망상’이라는 저서를 썼다. 책을 쓰게 된 배경에는 “미국이 온통 좌파의 음모로 위협받고 있다”는 주장으로 당시 공화당 대선 후보가 된 배리 골드워터가 있었다. 그는 소형 핵무기를 남베트남 국경에 사용하자고 주장했고 크렘린에 핵무기를 쏘자는 발언까지 일삼았다. 1964년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 수락연설에서는 그는 “자유의 수호에서 극단주의는 악이 아닙니다. 정의의 추구에서 절제는 미덕이 아닙니다”라는 말로 강경 보수층의 환호를 이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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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2월3일 밤 긴급 대국민담화를 통해 “헌정 질서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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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 사후 1년 뒤인 1964년 대선에서 배리 골드워터는 린든 존슨 현직 대통령에게 선거인단은 434명, 득표율은 22.6%포인트를 뒤지며 역사적 패배를 기록했다. 하지만 그는 ‘미스터 보수주의자’로 불릴 정도로 이후 미국 보수주의와 공화당 정계에 끼친 영향이 컸다. 그는 미국이 극단적으로 좌경화되고 있으며 이를 막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호프스태터는 배리 골드워터 같은 음모론자를 박해 망상, 극단적 의심, 자기 맹신 등의 성향을 보이는 ‘증오에 휩싸인 편집증 환자’로 묘사했다. 이 문장에서 배리 골드워터를 윤석열이라고 바꿔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음모론의 시대’를 쓴 전상진 서강대 교수에 따르면 음모론은 고통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과거 중세에는 고통의 이유를 신의 섭리에서 찾았다. 중세 국가들이 종교를 받아들인 것도 왜 내가 지금 고통스러운가를 설명해줬기 때문이다. 현세의 고통이 내세의 복과 영생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나름의 합리적 설명이었다. 하지만 르네상스 이후 종교가 힘을 잃으면서 나타난 새로운 설명 기제가 바로 음모론이다. 내가 혹은 우리 사회가 고통스러운 이유는 공적인 사회 시스템과 별도로 그들을 움직이는 그림자 세력이 있기 때문이란 주장이다. 그림자 정부(deep state), 비밀결사 일루미나티, 로스차일드 가문, 혹은 종북주사파로 그 이름이 변할 뿐이다.



윤 대통령은 대한민국에 암약하는 종북주사파에서 본인이 고통받는 이유를 찾았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공소장 보도를 보면, 지난해 11월24일 윤 대통령은 명태균 의혹 등을 거론하며 “이게 나라냐.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본인 목소리가 담긴 공천개입 녹취록으로 정권 도덕성이 치명상을 입은 상황에서 윤 대통령의 비난 대상은 명씨도, 대화를 중개한 부인 김건희씨도 아니었다. 엉뚱하게도 합리적 문제 제기를 한 야당이었다. 윤 대통령이 비상계엄 명분을 구국의 결단, 종북주사파 척결, 미래 세대를 위한 특단의 대책으로 묘사했지만, 사실은 자기 보신으로 보이는 이유다.



그렇기에 윤 대통령이 철석같이 믿었던 부정선거 음모론은 계엄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계엄의 자기 합리화일 가능성이 높다. 부정선거를 바로잡는 것이 계엄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명태균 게이트와 김건희 특검으로 본인과 아내가 위험해지자 부정선거 음모론을 이용해 계엄의 명분을 찾으려 했던 것으로 보는 게 더 합리적이다. 결국 배리 골드워터와 윤석열의 차이는 전자는 신념형 음모론자라면, 후자는 사익 추구형 음모론자란 점일 것이다.



캐스 선스타인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는 저서 ‘루머’에서 루머꾼의 종류를 편협하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 구체적인 목적이 아닌 일반적인 이익을 좇는 자, 남을 위해 일하는 자, 남에게 해를 끼치려는 악의적인 자 등으로 분류했다. 윤석열은 어디에 속할까. 입만 열면 법치주의를 강조하던 사람이 법원에서 발급한 영장 집행도 거부하며 관저에서 농성 중이다. 아스팔트 보수는 그를 영웅으로 떠받들고 있지만 실은 그는 영웅이 아니라 구질구질한 이기주의자다. 본인이 살아남기 위해 음모론을 이용해 사람들을 동원하고 있다. 극우 유튜버는 사람들을 선동하면서 억대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 불쌍한 것은 물정 모르고 윤석열 사익에 동원되고 있는 평범한 보수 시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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