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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8 (수)

"우연히 시작된 혁신, 필연이 된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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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텀

지난 11월 14일 서울 한양대학교에서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주최로 열린 ‘실리콘밸리의한국인2024’에서 김영준 비거라지(B GARAGE) 대표가 발표하고 있다. / 사진=스타트업얼라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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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창업 이야기라고 하면 대단한 비전과 거창한 포부로 시작하는 것을 떠올린다. 하지만 어쩌면 가장 진실된 창업은 작은 필요와 우연한 기회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거라지의 김영준 대표의 이야기가 그렇다. 자율비행 소프트웨어 하나로 시작한 작은 시도가 오늘날 370억 원의 투자를 받은 글로벌 스타트업이 될 줄은, 아마 그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난 11월 14일, ‘실리콘밸리의 한국인 2024’ 행사 연사로 나선 김영준 대표는 자신의 창업기를 담담히 전했다. 그는 학교 선배이자 동아리 선배인 장병규 의장을 따라가 네오위즈에서 일했다. 당시 같은 팀에는 지금 라인야후(LY) CPO인 신중호와 보이저엑스 대표인 남세동 등이 있었다. 거대한 나무들이 자라날 씨앗들이 한 팀에 있었던 셈이다. 그곳에서 그는 열정적으로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스타트업의 첫 맛을 보았다. "다들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그렇게 열심히 일하면 회사가 빠르게 성장한다는 걸 직접 목격했죠."

유학 생활도 흥미롭다. 컴퓨터 공학을 전공했지만, 비행체에 대한 애정 때문에 항공우주공학을 공부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인공지능 연구실에서 강아지 로봇 프로젝트를 하게 되었다. 보스턴 다이내믹스가 만든 하드웨어에 군사용 소프트웨어를 얹는 작업이었다. 그러다 지도교수가 갑자기 창업을 하겠다며 퇴직했다. 흔히 말하는 '이벤트'였다. 그는 교수를 따라가는 대신 구글과 오라클에서 일하며 실리콘밸리의 문화를 배웠다.

"문화적 충격이었어요." 그의 말에는 무게가 있다. 한국에서 자유로운 분위기의 회사를 경험했다고 생각했지만, 미국의 회사 문화는 전혀 달랐다. 다양한 인종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일하는 방식, 의사결정 과정, 협업 문화는 그에게 새로운 세계였다.

박사 과정으로 돌아와서는 자율주행 연구실에서 자율비행을 연구했다. 도요타와 포드에서 연구자금을 대는 연구실이었다. 그때 그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자율주행 회사는 넘쳐나는데, 드론의 자율비행을 연구하는 회사는 거의 없었다. "분명 드론도 자율비행 기술이 필요할 텐데, 이상하게도 이 분야는 경쟁이 덜했어요."

2017년, 그는 자율비행 소프트웨어 회사를 시작했다. 큰 회사를 만들겠다는 야망보다는, 이런 기술이 필요한 곳이 있을 거라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회사 이름은 실리콘밸리의 유명한 로봇 회사 '윌로우 개러지'에서 따왔다. 로봇 운영체제(ROS)를 개발해 로봇 산업의 판도를 바꾼 이 회사처럼, 그도 자신만의 혁신을 꿈꿨다.

전환점은 2020년에 찾아왔다. 우연히 참석한 모임에서 만난 미국 물류 회사 임원이 제안을 했다. 물류창고 재고조사에 자율비행 드론을 활용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때 그는 세 가지를 깨달았다. 물류 시장이 전 세계 GDP의 10%를 차지하는 거대한 시장이라는 것, 특히 북미와 유럽에서 인력난으로 자동화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들의 기술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비거라지가 만든 드론은 창고 내 재고를 자동으로 조사한다. 웹에서 버튼 하나만 누르면 드론이 날아가 사진을 찍고, 컴퓨터 비전으로 재고를 파악한다. 단순해 보이는 이 기술이 실은 큰 문제를 해결한다. 미국 물류창고의 재고 정확도는 평균 95%. 100번 물건을 찾으러 갈 때 5번은 못 찾는다는 뜻이다. 이는 비용으로 직결된다. 재고 정확도가 낮은 기업은 매출 달러당 175달러의 재고를, 높은 기업은 60달러의 재고만 보유하면 된다.

현재 비거라지는 6-70명 규모의 회사로 성장했다. 미국과 한국에 법인을 두고 있으며, 직원의 90%가 엔지니어다. 하지만 성장통도 겪고 있다. 미국의 자율주행 전문가들은 대부분 박사급이고, 한국의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엔지니어들은 또 다른 배경을 가졌다. 같은 엔지니어라도 사고방식과 일하는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자율적인 문화다. "자율이 목적이 아니라 필연이었어요.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함께 일하려면 오히려 규칙을 최소화하는 게 효율적이더라고요." 여기에 국가 간 협업이라는 과제도 있다. 미국, 한국, 그리고 앞으로 진출할 유럽까지, 서로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의 서비스를 만들어낼 것인가.

하드웨어는 또 다른 도전이었다. "하드웨어만큼은 하지 말라고들 하더라고요." 그러나 필요에 의해 시작한 하드웨어 개발이 회사의 핵심 경쟁력이 됐다. "이제는 애플이 얼마나 대단한 회사인지 이해가 돼요.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모두 잘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몸소 깨닫고 있습니다."

3-4년 전만 해도 북미와 유럽에서 비슷한 시도를 하던 회사가 10개 정도 있었다.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고, 북미의 비거라지와 유럽의 한 회사만이 남았다. 실내 자율비행이라는 기술적 허들이 생각보다 높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허들을 넘어선 소수의 회사에게 이제 전 세계에서 문의가 쏟아지고 있다.

김영준 대표의 이야기는 창업의 또다른 본질을 보여준다. 거창한 비전보다는 작은 문제 해결에서 시작해 꾸준히 성장하는 과정, 우연한 기회를 놓치지 않는 순간들, 그리고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여정. 이것이 현실의 스타트업이 마주한 진짜 모습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들을 자율 로봇 시스템으로 도와주고 싶어요." 단순한 말 같지만, 그 속에는 기술을 위한 기술이 아닌, 인간을 위한 기술을 만들고자 하는 진정성이 담겨 있다. 우연으로 시작된 혁신이 현실이 되어가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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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손요한(russia@platum.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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