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날인 1일 오전 전남 무안국제공항에서 제주항공 참사 유가족들이 서로 감싸 안고 일출을 보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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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운 | 부산 엠비시 피디
일상을 이어가기 힘겨운 십이월이었다. 난데없는 불법 비상계엄에, 내란을 획책하고도 일말의 죄책감조차 없는 내란수괴의 후안무치가 끔찍했다. 하지만 쉴 새 없이 밀려드는 분노 속에서 동료 시민의 용기와 공동체의 희망을 목격하는 한달이기도 했다.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자들의 작태가 저열할수록 불빛과 함께 거리를 채우는 시민들의 결기는 존엄했다. 분노에 지치지 말고 단단한 일상을 유지하며, 내란범들을 단죄하는 일을 똑똑히 지켜보자고 다짐했다.
다짐 속에 한해를 마무리하던 12월29일, 제주항공 참사가 일어났다. 며칠 뒤, 다른 지역 방송국에서 일하던 동료 피디가 사고 여객기에 타고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는 직접 만나 통성명을 한 적도 없고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지만, 비슷한 시기에 입사한 지역 방송국 피디들이 모인 단체 채팅방에 함께 속해 있었다. 그와 나는 언제 만나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제 영영 그럴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 애달팠다.
겨우 이 정도의 작은 인연을 가진 내 마음이 이런데, 그를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의 심정이 어떨지 차마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이번 참사로 179명이 세상을 떠났다. 내 빈약한 상상력은 그들이 사라진 자리에 흐르고 있을 비통함과 상실감의 언저리에조차 닿지 못한다. 누군가의 세계는 참혹하게 무너졌는데, 나의 오늘은 어제와 같이 평온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러다 오래전 읽은 문학 평론가 신형철의 저서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떠올렸다. 책엔 이런 구절이 있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라면 인간은 자신이 자신에게 한계다. 그러나 이 한계를 인정하되 긍정하지는 못하겠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슬퍼할 줄 아는 생명이기도 하니까. 한계를 슬퍼하면서, 그 슬픔의 힘으로, 타인의 슬픔을 향해 가려고 노력하니까.’
나는 타인의 슬픔 앞에서 자주 무력했다. 누군가를 위로하고 싶지만, 그의 슬픔을 완전히 헤아릴 수 없으니 정확한 위로를 건넬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가늠할 수 없는 상실 앞에 어쭙잖은 위로를 하겠답시고 너무 많은 말을 하거나 어떤 말을 하지 않아서 그를 상처 입힐까 두려웠다. 가끔은 어설픈 위로보다 충분히 추스를 시간을 존중해주는 게 좋겠다는 핑계 뒤로 몸을 숨겼다. 타인의 고통과 슬픔 앞에 머뭇대는 내가 자주 부끄러웠다.
하지만 내가 절망과 무력 속에서 허우적댈 동안에도 누군가는 거침없이 타인의 곁으로 향한다. 그들은 정확한 위로의 말을 고민하는 대신 몸을 움직인다. 그렇게 무안으로 달려가 얼굴도 몰랐던 이들을 위해 밥을 짓고, 현장에 필요한 물건을 바리바리 싸서 보내고, 아이들의 손을 잡고 분향소를 찾아 애도를 전한다. 누군가의 슬픔에 온전히 가닿지 못할 걸 알면서도, 슬픔에 지지 않고 계속해서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12월31일 밤엔 각기 다른 지역에서 일하고 있는 동료들과 연말 인사를 나눴다. 그들은 조만간 세상을 떠난 동료가 일하던 도시에 간다고 했다. 동료들에게 함께 그곳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새해 덕담을 나누며 우리는 곧 그곳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 우리가 간다고 그가 떠난 자리가 메워지지 않을 걸 알지만, 그를 잃은 이들의 슬픔을 완전히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그곳에서 떠난 동료를 애도하고 남은 이들을 위로하려 애쓸 것이다. 그날의 나는 타인의 슬픔 앞에서 스스로를 조금 덜 부끄러워할 수 있을까.
제주항공 참사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고통도 슬픔도 없는 곳에서 편히 쉬시길 기도한다. 이번 참사가 그저 누군가의 불운으로 치부되지 않기를, 사고의 전말이 명백히 밝혀져 사랑하는 이를 잃은 이들과 생존자들이 회복에 전념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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