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4일 새벽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무장한 계엄군이 진입을 시도하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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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구 | 선임기자
영국의 인류학자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는 책 ‘황금가지’에서 “고대왕국의 정치가 인민이 오직 군주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전제정치라고 보는 생각은 잘못”이라고 했다. 거꾸로, “군주는 오직 인민을 위해서만 존재하며, 소임을 다하지 못하면 불명예스럽게 쫓겨나거나 생명을 부지할 수조차 없는 존재”였음을 많은 사례를 들어 보여줬다. 중국 사서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부여 조에도 “부여의 옛 풍속에 가뭄이나 장마가 계속되어 오곡이 영글지 않으면 그 허물을 왕에게 돌려 ‘왕을 마땅히 바꾸어야 한다’고 하거나 ‘죽여야 한다’고 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왕이 허약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5년 또는 12년마다 죽이고 새로 뽑는 나라도 있었다. 애초 왕은 공동체와 구성원의 삶에 무한 책임을 지는 존재였다.
정복 국가의 팽창은 왕권 강화 과정이기도 했다. 왕위는 세습되고, 주술을 대신해 정교해진 종교와 정치이념은 왕에게 백성을 잘 돌보라는 도덕적 책무만 남겼다. 519년간 27명의 왕이 통치한 조선에도 백성의 삶을 도탄에 빠뜨린 왕이 많았다. 양반 사대부들은 2명을 끌어내렸지만, 처형하지는 않았다. 상당수 백성은 병역에서도 제외되고 국가가 아닌 소유주에게 신분세(신공)를 내는 노비로 살았다.
‘백성이 주인’인 민주공화제는 조선이 망하고, 백성들의 의회 설립 요구를 끝내 짓밟은 왕(고종)이 죽은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돛도 닻도 없는 조각배로 태어났다. 공화는 왕이 없는 정치체제, 민주도 대표자를 국민이 선출한다는 의미를 넘지는 못했지만, 1894년 동학농민전쟁, 1898년의 만민공동회, 1919년 3·1운동을 거치며 흘린 백성의 피가 강을 이루고서야 그 배는 뜰 수 있었다.
광복 뒤, 민주공화정이 출범했다. 그런데, 국민이 뽑은 대통령들은 국민 주권을 유린하고 종신왕을 꿈꾸기 일쑤였다. 이승만은 경찰을 동원해 왕 노릇을 했고, 박정희는 군과 정보기관을 등에 업고 군림했다. 그가 죽임을 당한 뒤 ‘서울의 봄’을 전두환이 또 짓밟았다. 이에 맞서 싸운 1960년의 4·19 혁명과 1979년 부산·마산 항쟁,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의 6월 민주항쟁은 다른 어느 나라의 현대사에서도 찾기 어려운 ‘장엄한 역사’다.
그렇기에 대통령 윤석열의 12·3 친위 쿠데타 기도는 너무 충격적이다. 기억에서 지워져가던 비상계엄을 43년 만에 다시 끄집어내, 국회를 무력화하고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윤-김 왕정’을 세우려 했다. 발상이 놀라 까무러칠 지경이다. 어쩌다 이 나라 정치는 저런 미치광이를 전제왕과 다름없는 힘을 가진 대통령으로 뽑게 됐을까? 혀를 깨물고 피눈물을 쏟은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윤은 경제와 외교를 필두로 국정 운영에 너무 무능하고 무책임했다. 오기 부리듯 밀어붙인 ‘감세·긴축’ 재정 정책은 민생을 망가뜨렸다. 지지율이 2년차에 30%대로, 3년차엔 20%대로 떨어졌다. 여기에 배우자 김건희 문제 처리에서 ‘공정과 상식’을 저버려 사실상 국민의 탄핵을 받은 처지였다. 그러자 자신에게 등 돌린 주권자를 향해 총부리를 들이대는 미치광이 짓을 벌였다.
비상계엄만큼이나 놀라운 것이 여당 국민의힘과 몇몇 장관을 포함한 고위 공직자들의 움직임이다. 내란 수괴에 대한 탄핵 심판과 수사를 방해하느라 여념이 없다.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을 늦추고 최대한 시간을 벌어 정국을 흔들 기회를 엿보자는 속셈이 뻔하다. 민주공화국의 공직자가 아니라, 미치광이 왕의 충실한 신하로 행동하고 있다. ‘왕과 함께 순장’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행보다.
그날 이후, 우리는 붕괴 위기에 처했던 민주공화제를 제자리에 온전히 돌려놓으라는 숙제를 받았다. 제도의 위기를 부른 원인을 찾아 교정함으로써 한 단계 더 성숙시키라는 역사적 과제도 받았다. 대통령에게 과도하게 집중된 권력을 분산하는 개헌도 그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당분간은 불가능한 일이 돼가고 있다. 100석 넘는 의석을 가진 국민의힘이 말하는 개헌론엔 12·3 내란에 대한 성찰이 한줌도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다.
차곡차곡 쌓아온 시민의 민주역량이 12·3 내란을 좌절시켰다. 그러나 내란 우두머리의 권력을 완전 박탈하고 구속·수감할 때까지, 저 많은 국회의원과 고위 공직자들이 헛소리를 그칠 때까지 내란은 평정되지 못한 상태임을 뼈저리게 느끼는 하루하루다. 주권자 시민은 각자 제자리를 단단히 지켜야 한다.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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