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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7 (화)

이슈 미술의 세계

앗, 달걀 껍질을 깼는데 달걀프라이가?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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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민의 그림책이 철학을 만날 때



한겨레

호라이 | 서현 글·그림, 사계절(2021)


우리가 흔히 ‘후라이’라고 부르는 달걀프라이가 공깃밥을 박차고 세상으로 나간다. 밥을 먹으려던 아이의 머리 위에 얹혔다가 누워 있는 아빠를 덮는 이불이 되기도 하고, 빨랫줄에 널려 바람을 맞거나 운동회에 참가해 트랙을 달리기도 한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순간이동이라도 하듯 엉뚱하고 기발한 곳에 등장하는 이 주인공의 이름은 호라이. “오라이(All right)!”가 연상되는 경쾌한 긍정의 주문 같기도 하고, 마음먹었다면 어디로든 가도 좋다는 흥겨운 응원 같기도 하다. 심지어는 외침 속에, 무언가의 사이에, 마트료시카처럼 안에 또 그 안에 들어있기도 하고, 죽었다가 환생하기도 하는 호라이. 시공간뿐 아니라 우리의 관념 체계를 신나게 어지럽히며 돌아다니는 호라이 덕분에 우리 고정관념도 노른자처럼 톡 터질 것 같고, 딱딱하게 굳은 경계선도 달걀프라이처럼 말캉해지는 느낌이다. 그림책 표지에서부터 밥상머리에 무릎을 꿇고 사람처럼 앉아 있는 호라이의 모양새가 어찌나 다소곳한지 미소가 절로 나온다.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들이 귀여움으로 치장하고 그림책이 된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초현실주의 기법으로 알려진 ‘데페이즈망(dépaysement)은 원래 정든 고국이나 고향을 떠난다는 뜻의 프랑스어인데, 익숙한 물건을 일상적 질서에서 떼어 내 낯선 곳에 둠으로써 신선한 긴장이나 충격을 주는 기법의 예술 용어로 자리 잡았다. 벽난로에서 연기를 뿜으며 튀어나오는 기차라든지, 하늘에서 비처럼 내리는 신사들, 유리잔에 담긴 구름 같은 것들. 요절한 프랑스 시인 로트레아몽의 “수술대 위에서 재봉틀과 우산이 우연히 마주치는 것처럼 아름다워”라는 구절이 달리나 마그리트 같은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영감을 길어 올리는 샘이 되었다고 한다. 정든 나라를 떠난 이방인의 눈에 비친 외국 사회는 불안인 동시에 자유이듯, 익숙한 사물을 불안한 방식으로 결합시켜 만드는 세계는 파괴적이고도 창조적이다. 철학의 기본은 낯설게 하기다. 익숙한 질서를 뒤집어 맛보는 새로움이 오랜 경계를 허문다. 수박을 깨뜨리면 달걀이 나오다니. 아니, 애초에 껍질이 깨졌는데 병아리가 아닌 달걀프라이가 나오다니.



한겨레

호라이호라이 | 서현 글·그림, 사계절(2021)


서현 작가의 ‘호라이’와 ‘호라이호라이’는 두 권이 함께 짝을 이뤄 나온 책으로, 연결된 듯 색다른 느낌을 준다. ‘호라이’가 예측불허라면 ‘호라이호라이’는 점입가경. ‘호라이’가 지구 안에서 기발한 장소를 두루 거친다면, ‘호라이호라이’는 범우주적인 스토리로 확장된다. 깔끔하고 감각적인 스냅숏 모음 같은 ‘호라이’에 비해, ‘호라이호라이’는 콩테로 명암을 살린 원화들이 호라이의 우주 대모험을 좀 더 서사적으로 풀어낸다. 노랗게 내리쬐는 태양 아래 알을 깨고 나온 호라이. 조용히 자기 자리를 찾아 밥그릇 위로 올라가지만, 이내 밥 위에만 있고 싶지 않다며 공깃밥을 박차고 떠난다. 호라이는 자기가 무엇이었을지 생각해 본다. 껍질을 벗은 달이나, 하얀 눈밭에 떠오르는 태양은 아니었을까? 누군가의 멋진 모자? 맹수의 노란 눈? 우주를 유영하는 우주선이었을지도 몰라. 알을 깨고 나온 생명은 사실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다. 한 인간이 태어날 때마다 이 우주는 새롭게 태어난다는 한나 아렌트의 철학을 굳이 가져오지 않더라도 알은 그 자체로 생명의 근원이다. 동그란 껍질 안에 한 우주가 들어있는 것이다. 지구도 하나의 거대한 알이라는 서현 작가의 상상력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한 맛이 있다.



특별한 반찬이 없을 때 휘릭 부쳐 먹을 수 있는 달걀프라이라서 더욱 특별함이 느껴지는 호라이의 자아 찾기 모험. 마지막에 다시 깨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알 - 혹은 세계 - 하나가 눈길을 끈다. 두 권의 책은 그렇게 멈추지 않고 끝없이 동그랗게 이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평소에 잡아먹히는 쪽인 작고 연약한 호라이가 물음표라는 심오한 씨앗을 품으면 우주까지 날아갈 수 있다는 사실도 좋고, 그런 호라이의 자아가 한껏 광대해지는 결말이 아니라 지구라는 연약한 알을 통해 다시 연약한 나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구성도 맛이 깊다. 개인적으로는 작고 노란 호라이들이 모여 페이지를 뒤덮는 모습은 물음표가 모이는 광장, 촛불 가득한 기도의 공간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스 신화에서 호라이는 시간과 계절의 여신들이기도 하다. 한 해가 바뀌는 시점에 호라이의 유쾌하고 철학적인 모험과 함께 나의 크기와 점성, 강도에 관해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껍질을 깨고 나온 호라이가 우리의 껍질도 톡톡, 깨어 줄 것이다.



이진민 철학자



한겨레

이진민 철학자


*그림책이 철학을 만날 때 : ‘언니네 미술관’ 등의 책으로 철학 대중화에 힘쓰는 철학자 이진민이 어른을 위한 그림책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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