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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5 (일)

‘100세 타계 카터’… 기자는 떠나고 부고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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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YT·WP 등 카터 訃告 기사에 작고 기자들 바이라인 줄줄이 등장

조선일보

지난해 12월 30일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별세 소식을 1면 머리기사로 전한 영국 가디언 등 일간지들. 일부 영어권 매체는 은퇴했거나 사망한 기자의 이름을 부고 기사에 포함시켰다. 카터 사망 수십 년 전부터 부고 기사를 작성하며 대비했던 기자들의 공헌을 존중한 것이다.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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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 100세로 별세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죽음을 계기로 부고(訃告)에 각별한 정성을 쏟는 영미권 언론의 관행이 재조명되고 있다. 주요 언론사가 카터의 생애와 경력을 다룬 장문(長文)의 부고 기사를 신속하게 보도한 가운데, 상당수 기사의 바이라인(by-line·작성자 이름을 적는 줄)에 이미 퇴직했거나 사망한 언론인의 이름이 들어간 것으로 나타났다. 전직 대통령 같은 유명인의 경우 발자취를 담은 부고 기사를 미리 작성해 두고 보완해 가며 갑작스러운 별세에 대비한다. 카터는 워낙 장수했기 때문에 수십 년 전 작성된 내용까지 최종 발행된 기사에 포함되면서 당시 작성자의 이름이 함께 들어간 것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1일 “카터는 자신의 부고 기사를 쓴 많은 기자보다 오래 살았다”며 “카터의 장수는 이(기자)들이 언론계뿐 아니라 삶의 번민(mortal coil)에서도 벗어났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고 보도했다. WP의 부고 기사 바이라인에는 카터 행정부의 백악관을 출입하고 지난해 사망한 에드워드 월시 기자의 이름이 들어갔다. 뉴욕타임스(NYT) 기사에도 2017년 별세한 로이 리드의 이름이 현 백악관 담당 기자와 함께 올랐다. 리드는 카터가 말년을 보낸 고향 조지아를 비롯한 미국 남부 지역을 오랫동안 담당했던 기자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기사는 카터 재임 시절 워싱턴 특파원이었던 해럴드 잭슨의 이름으로 발행됐다. 잭슨은 2021년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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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스 지미 카터 부고. 기자 이름 중 이미 세상을 뜬 '로이 리드'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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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델피아 지역 신문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의 기사에는 2008년 퇴직한 래리 아이셸 기자의 이름이 있었다. 아이셸은 정치 분야를 담당하던 1990년에 당시 66세였던 카터의 부고 초안(草案)을 작성했다고 한다. 은퇴 후 비영리 기구의 고문을 맡고 있는 그는 “리처드 닉슨, 제럴드 포드, 로널드 레이건, 지미 카터 등 당시 생존해 있던 전직 대통령 네 명에 대한 부고 기사를 미리 준비해 두라는 지시가 있었다”면서 “전직 대통령들을 (기사를 통해) 제대로 대우하고 싶어도 마감 시간에는 그럴 수 없기 때문”이라고 WP에 말했다. 아이셸의 딸로 대를 이어 같은 신문사에 근무하는 부편집장 몰리는 X에 “아버지는 내가 네 살일 때 카터의 부고 기사 초안을 썼다”며 “(퇴직 이후) 16년 만에 아버지의 기사가 1면에 등장한다”고 했다.

영미권 언론은 작은 전기(傳記)라 할 수 있는 부고 기사에 각별한 정성을 쏟는다. 미국 외교의 거목이었던 헨리 키신저 전 국무 장관이 2023년 별세하자 NYT는 신문 1면을 포함한 총 8면에 걸쳐 키신저의 생애와 업적을 상세하게 보도했다. 16세에 미국 최초 여성 비행사가 된 엘리너 스미스의 NYT 부고 기사는 스미스가 20세였던 1931년 처음 작성됐다. 비행 중 사고로 갑작스럽게 사망할 경우에 대비해 미리 써둔 기사를 80년 가까이 다듬어 2010년 별세했을 때 최종 발행했다. 부고 전문 기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와 드라마가 제작될 정도로 독자들의 관심이 크고, 부고 기사만 따로 모은 서적 출간도 활발하다. 부고만 쓰는 기자를 따로 두는 곳도 많다. 월스트리트저널에서 45년 근무한 제임스 해거티 기자는 부고 기사만 1000건 넘게 썼다.

가디언의 로버트 화이트 부고 편집 담당은 “유명 인사가 70세가 되면 부고 기사 문제를 생각하기 시작한다”며 “(생존 인물에 대한) 부고 기사를 2000편 정도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해당 인물이 살아있는데 부고 기사가 나오는 해프닝도 벌어진다. 피플지는 2014년 할리우드의 전설적 배우 커크 더글러스가 사망했다며 기사를 통해 그의 일대기를 조명했다. 그러나 오보로 판명됐고 더글러스는 이후 6년을 더 살았다. 블룸버그도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2011년 사망)의 부고 기사를 2008년에 실수로 냈다가 삭제한 적이 있다. 작가 마크 트웨인(1835~1910)은 1897년 자신의 부고가 나오자 “기사가 너무 과장됐다”는 소감을 남기기도 했다. 프랑스 공영 라디오 방송 RFI는 2020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축구 황제 펠레 등 당시 생존해 있던 세계 유명 인사 100여 명의 부고를 실수로 냈다가 사과했다.

[워싱턴=김은중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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