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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현장에서 예상치 못한 것들을 발견할 때가 있다. 지난주 스타트업 A사의 회의실에서 마주한 것도 그런 것들 중 하나였다.
처음에는 그저 흔한 사무실 벽면의 장식물 정도로 생각했다. 81개의 칸으로 이루어진 격자무늬. 멀리서 보면 마치 스도쿠 퍼즐이나 바둑판처럼 보이는 그것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을 때, A사의 김 대표가 내게 다가왔다.
"이게 바로 현재의 오타니를 만든 거예요."
그가 태블릿을 펼쳐 보여준 것은 14년 전, 한 고등학생이 그린 계획표의 번역본이었다. 지금은 '성실한 천재'라 불리는 오타니 쇼헤이의 청사진이라고 했다. 나는 그 순간 이상한 위압감 같은 것을 느꼈다. 한 십 대가 자신의 미래를 이토록 세밀하게 계획했다는 사실이, 마치 내 과거의 안일함을 질책하는 것만 같았다.
가로 9칸, 세로 9칸. 그 안에는 일본 프로야구 드래프트 1순위 지명을 위한 세부 계획들이 빼곡했다. '몸만들기', '제구력', '구위', '멘탈', '구속', '인간성', '운', '변화구 구사 능력'… 야구 선수로서 갖춰야 할 기술적인 요소들은 물론이고, '감사', '배려', '예의', '인사하기', '휴지 줍기' 같은 일상의 작은 덕목들까지 꼼꼼하게 적혀 있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18세부터 42세까지의 장기 계획이었다. 18살에 메이저리그 구단과 계약, 20살에 메이저리그 승격, 21살에 선발 진입과 16승, 22살에 사이영상 수상…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를 다녀온 사람처럼 구체적인 목표들이 적혀 있었고, 놀랍게도 그것들은 대부분 현실이 되었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을 떠올렸다. "재능이란 것은 좋아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이다." 오타니의 만다라트를 보고 있자니, 그의 말이 더욱 실감 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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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다라트의 기본 구조는 단순하면서도 정교하다. 3x3 격자가 아홉 개 모여 있는 형태로, 총 81칸으로 구성된다. 중앙에 가장 큰 목표를 적고, 그 주변에 여덟 개의 세부 목표를 배치한다. 각각의 세부 목표는 다시 여덟 개의 실행 계획으로 분화된다. 이렇게 하면 1개의 핵심 목표, 8개의 세부 목표, 64개의 실천 방법이 하나의 거대한 전략 지도처럼 펼쳐진다.
만다라트가 주목받는 이유는 그 효과성에 있다. 우선 시각화 측면에서 강점을 보인다. 마치 위성사진을 보듯 전체 목표와 계획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또한 프랙털 구조처럼 큰 목표가 작은 목표들로 체계적으로 분화되면서, 자연스럽게 논리적 사고를 유도한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균형'이다. 여덟 개라는 숫자는 우리 뇌의 인지적 한계와 맞닿아 있다. 너무 많지도, 너무 적지도 않은 이 숫자는 다양한 영역을 균형 있게 고려하면서도, 각각에 충분한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준다.
실제 활용에 있어서도 만다라트는 몇 가지 중요한 원칙을 제시한다. 목표는 구체적이고 측정 가능해야 하며(SMART 기법), 정기적인 검토와 수정이 필요하다. 계획표는 눈에 잘 띄는 곳에 두고 자주 확인하는 것이 좋으며, 목표 달성 시의 보상까지 미리 계획해두면 더욱 효과적이다. 조직에서 만다라트를 활용할 때의 장점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전략적 사고를 촉진한다. 조직의 비전부터 개인의 실행 계획까지 논리적으로 연결되면서, 구성원들의 전략적 사고가 자연스럽게 발달한다. 둘째, 창의적 발상을 돕는다. 81칸이라는 넓은 캔버스는 다양한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셋째, 조직의 정렬(alignment)을 강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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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를 위해 여러 기업을 방문하면서, 이 만다라트라는 도구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개인의 꿈을 담는 그릇에서, 이제는 거대한 조직의 DNA를 설계하는 청사진으로 변모해가고 있었다.
C사의 인사팀 박 매니저는 자신의 책상 위에 놓인 만다라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조직이 커질수록 우리가 마주하는 가장 큰 도전은 '정렬'이에요. 회사가 바라보는 방향과 개개인이 느끼는 현실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좁힐 것인가. 만다라트는 그 해답이 되어주었죠."
하지만 모든 혁신 도구가 그렇듯, 만다라트 역시 마법의 지팡이는 아니었다. D사의 경우 도입 6개월 만에 전면 철회를 선언했다. "도구는 도구일 뿐"이라는 한 임원의 말이 오래도록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의 말에는 쓴맛 같은 것이 배어 있었다.
문득 서울 시내 곳곳에서 마주치는 버려진 공유 자전거들이 떠올랐다. 아무리 좋은 도구라도,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토양에서는 이물질이 되고 만다. 우리는 종종 도구 자체에 지나친 기대를 걸곤 한다. 마치 새로운 다이어트 제품을 사는 것만으로 살이 빠질 것처럼, 혹은 비싼 운동화를 사는 것만으로 달리기 실력이 늘 것처럼 착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타니의 만다라트가 특별한 것은, 그것이 단순한 계획표가 아니라 한 소년의 진심 어린 약속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18세의 소년이 그린 미래가 현실이 된 것은, 그 격자 속 하나하나의 칸이 단순한 글자가 아닌 살아있는 의지였기 때문이리라.
결국 중요한 것은 계획의 치밀함이 아니라,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의 무게다. 81개의 칸이 주는 위압감에 짓눌릴 필요는 없다. 때로는 한 칸의 진실된 실천이, 여든한 칸의 완벽한 계획보다 더 큰 울림을 준다는 것을 나는 이번 취재를 통해 배웠다.
그러고 보니 오타니의 만다라트에는 재미있는 특징이 하나 있었다. 바로 '운'이라는 항목이었다. 천재라 불리는 그도,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어쩔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걸까.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성숙한 계획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글 : 손요한(russia@platum.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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