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
오래전에 전남 구례 화엄사에서 얼마 동안 지낸 적이 있다. 법당 입구의 관광 상품 매점에 걸린 타올에 이런 시가 적혀 있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묵은해니 새해니 분별하지 말게/겨울 가고 봄 오니 해 바뀐 듯하지만/보게나 저 하늘이 달라졌는가/사람들이 어리석어 꿈속에 살지
을사년(乙巳年) 새해가 밝았는데 왜 이리 가슴이 무거운가. 을사조약의 가위눌림 탓일 게다. 1904년 11월 17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고종을 만나 조약문을 내놓으며 조인을 요구하자 고종은 감기가 심하니 대신들과 상의하라고 했다. 망국의 순간에 감기가 그렇게 대수였나. 이토는 소집된 각의에 들어가 조약의 서명에 동의할 것을 요구했다.
각의에는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 여덟 명이 참석했다. 한규설만이 목숨을 걸고 반대했고, 민영기가 서명을 거절했고, 이하영은 어물어물했고, 나머지 다섯 명이 찬성했다.
한규설(韓圭卨·1848~1930·사진)은 조선 말에 무과에 급제해 참정대신(영의정 상당)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다. 문민우위 원칙을 고수하던 시대에 무과 출신이 그만한 지위에 오른 것은 덕망이 빼어나서였을 것이다. 을사조약 체결 사흘 뒤 이토가 하직 인사를 하자 고종은 “큰일 하느라 고생하셨는데 며칠 쉬다 가지 왜 그리 서둘러 가느냐”고 말렸다. 양국에서 조약이 비준되면 이토가 꼭 통감으로 부임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을사조약 120년을 맞으며 이 나라가 어떻게 달라졌나를 되돌아보는 마음이 산뜻하지 않다. 을사조약이 을사늑약(勒約)으로 바뀌었다고 무엇이 달라졌나. 걸핏하면 ‘토착 왜구’라고 몰아붙이는 세태를 보면서 역사가 바뀌는 데는 120년도 그리 길지 않다는 씁쓸한 생각이 들기 때문이리라.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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