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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4 (토)

[김명화의 테아트룸 문디] 뱀의 해에 읽는 오레스테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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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김명화 극작가·연출가


뱀의 해다. 징그러운 생김새 때문에 뱀에 대한 이미지는 부정적이다. 그렇지만 허물을 벗는 뱀은 재생과 변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오레스테이아’에 나오는 유메니데스도 그 뱀과 관련이 깊다.

최초의 비극 작가인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는 트로이 전쟁을 일으켰던 아가멤논 집안의 복수극을 다룬 작품이다. 아가멤논 집안은 대대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가족끼리 살인과 복수를 일삼았던 아트레우스 가문이다.

‘오레스테이아’는 이 가문의 마지막 복수극에 초점을 맞추었다. 딸까지 제물로 바치고 트로이 전쟁을 감행한 아가멤논을 그의 아내가 살해하고, 세월이 흘러 아들 오레스테스가 아비의 복수를 하겠다고 어미를 살해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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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그리스 비극은 3부작으로 하루 종일 공연했다. 근친살해로 얼룩진 전반부를 지나 관객들이 그 복수극에 신물이 날 때쯤 작가는 3부에서 뜻밖의 결말을 보여준다. 머리에 뱀이 똬리를 튼 복수의 여신 퓨리들이 추격하자 오레스테스는 아테네 여신에게 몸을 의탁하는데, 여신은 그리스 시민과 함께 재판과 투표를 통해 시비를 판별한 것이다.

작품이 발표된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는 민주주의가 번성하던 시기였다. 구체제와 신체제를 상징하는 퓨리와 아테네의 대비가 보여주듯 입장의 대립과 갈등이 첨예했으나, 그 차이를 경청하고 조율하는 성숙한 민주주의를 구가하였다.

결국 한 표 차이로 오레스테스는 구원받는다. 퓨리들에겐 도시에서 살 거처와 권리를 부여하면서 품위 있는 공존을 제안했다. 패자에게 무릎 꿇리는 정의 대신 자신들을 관용해준 도시를 축복하면서, 복수의 여신들은 이제 유메니데스(Eumenides), 즉 자비의 여신이 된다.

뱀의 해인 을사년. 퓨리의 허물을 벗고 성숙한 민주주의의 기운 속에 유메니데스로의 변신을 소망한다.

※‘테아트룸 문디’는 ‘세상은 연극 무대’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김명화 극작가·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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