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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4 (토)

[데스크의 눈] 카키스토크라시와 데모크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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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불위’ 트럼프에 어울렸던

최악 통치가 한국서도 벌어져

국민 힘으로 민주주의 지켜내

새해엔 무탈한 일상 이어지길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11월 말 올해의 단어로 선정한 ‘카키스토크라시(kakistocracy)’는 ‘가장 저급한 자들에 의한 통치’라는 의미로 그리스어 형용사 ‘카코스’(kakos·나쁜, 못된)의 최상급 ‘카키스토’(kakisto)와 ‘크라시’(cracy·지배)의 합성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앞서 2017년 45대 대통령으로 취임할 때 언급된 단어가 그의 두 번째 취임을 앞두고 또다시 등장한 것이다.

2017년 1월 트럼프 취임 직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뉴욕타임스(NYT)에 기고한 칼럼에서 트럼프에 대해 “자신을 비판하는 모든 사람을 향해 맹렬히 공격하고 위협하면서도, 대중 투표에서 졌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며 “우리가 너무나 명백하게 보고 있는 것은 미국의 카키스토크라시”라고 맹렬히 비판했다.

세계일보

이귀전 국제부장


미국의 정치학자 노먼 오언스타인도 트럼프 취임 9개월가량 지난 2017년 10월 미 매체 ‘더 애틀랜틱’에 “카키스토크라시는 17세기에 처음 사용된 용어로, 문자 그대로 우리 중 가장 나쁘고 가장 파렴치한 사람들이 다스리는 정부를 의미하는데, 넓게 보면 가장 무능하고 부끄러운 종류의 정부를 의미할 수 있다”며 “카키스토크라시가 돌아왔고, 우리는 미국에서 직접 그것을 경험하고 있다”고 신랄하게 지적했다.

트럼프 1기 행정부 때 유행한 이 용어가 트럼프의 패배와 함께 잠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가 다시 부상한 것이다.

일상에서 잘 사용되지 않는 단어이고, 미국 정치 상황을 비판하는 용어로 등장했기에 이코노미스트가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을 땐 이 단어를 흘려 넘겼다.

하지만 지난 10일 크루그먼 교수가 NYT에 실은 고별 칼럼 ‘분노의 시대에 희망을 찾다’에서 “최악의 통치인 카키스토크라시에 맞서 싸운다면, 결국 더 나은 세상으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며 ‘카키스토크라시’를 언급했을 때는 흘려 넘길 수가 없었다.

이코노미스트 발표 이후 불과 열흘 정도 지났을 뿐이지만 그 사이 한국에선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역사책이나 소설에서 다뤄지거나 아니면 영화, 드라마 소재로 쓰일 법한 ‘계엄’이 12월 3일 내려졌다. 윤석열 대통령은 ‘부정선거 의혹’과 ‘야당의 의회 독재와 폭거로 국정이 마비된 상황’ 등을 이유로 들며 계엄령을 발동했다고 밝혔다.

미국에서 트럼프를 염두에 두고 언급된 저급한 자들에 의한 통치 ‘카키스토크라시’가 한국에서 발현된 것이다.

크루그먼 교수가 2017년 카키스토크라시에 대해 언급한 “자신을 비판하는 모든 사람을 향해 맹렬히 공격하고 위협”, “대중 투표에서 졌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문구가 작금의 윤 대통령에게 딱 맞아떨어진다.

정치의 기본인 타협과 협의 대신 야당을 ‘독재와 폭거를 저지른 집단’으로 비난하고, 국회에 무장한 군인을 침투시킨 것을 “경고성 계엄”이라고 주장한 것은 오언스타인이 언급한 “가장 무능하고 부끄러운 종류의 정부”에 해당한다.

결국 ‘권한대행의 권한대행’이라는 웃지 못할 일까지 벌어졌다. 이런 상황이 지속하는 한 ‘안정’이란 말은 성립할 수 없다. 새 판이 짜져야 대내외의 우려를 잠재울 수 있다. 최대한 신속히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이 내려지고, 새로운 지도자가 선출돼야 한다. 권한대행 체제의 지속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만 안은 꼴이다. 뇌관을 빨리 제거해야 한다.

그래도 카키스토크라시의 저급함을 이겨낸 국민이 있어 우리는 ‘데모크라시(democracy?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었다. 총칼에 맞선 국민과 현장에 투입된 군인들의 이성적 판단 등으로 비상식적 상황을 막아냈다. 크루그먼 교수가 밝힌 “최악의 통치인 카키스토크라시에 맞서 싸운다면, 결국 더 나은 세상으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란 말이 미국이 아닌 한국에서 현실이 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국민이 지켜낸 것은 다름 아닌 평화로운 일상이다. 경제 활동을 하고, 가족과 함께하며, 동료를 만나는 하루하루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사소해 보이는 일상이지만, 이 틀이 깨지면 우리의 근간이 무너질 수 있다. 을사년 새해는 모든 이들의 평범한 일상이 무탈하게 이어지길 기원한다.

이귀전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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