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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2 (목)

‘선량함’ 앞세워 인권 외교…백악관 나와선 ‘세계 평화’ 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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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존경받는 전직 대통령

경향신문

중동 평화 ‘중재’·김일성과 ‘담판’·부인 로잘린과 ‘해비타트’ 29일(현지시간) 별세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생전 세계 평화와 인권에 헌신한 지도자로 평가받는다. 1979년에는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를 미국으로 초청해 중재를 이끌며 이집트·이스라엘 평화조약을 성사시켰다(왼쪽 사진). 1994년 1차 북핵 위기 당시에는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담판으로 북·미 협상의 물꼬를 텄다(가운데). 또 빈곤층 주거 문제 해결을 위한 사랑의 집짓기 운동에 동참했는데, 로절린 카터 여사와 함께 작업복을 입고 직접 자재를 자르며 창문을 제작하기도 했다(오른쪽). AP연합뉴스·카터센터·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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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임 후 ‘카터센터’ 설립
사랑의 집짓기 등 활동

북한 핵개발 동결 이끌고
첫 남북 정상회담 제안 등
한반도 안정에도 큰 영향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29일(현지시간) 100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퇴임 후 40여년 동안 세계 평화와 인도주의 실현 및 빈곤·질병 퇴치를 위해 헌신한 그는 가장 존경받는 미국 전직 대통령으로 불린다. 재임 시절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에 인권 상황 개선을 압박하며 주한미군 철수를 추진했고, 북핵 위기 해결을 위해 직접 방북하는 등 한반도와도 인연이 깊다.

카터 전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45분쯤 조지아주의 자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고 카터센터가 밝혔다.

지난 10월 100번째 생일을 맞아 역대 최장수 미 대통령 기록을 세운 카터 전 대통령은 오랫동안 피부암의 일종인 흑색종 등으로 투병해왔다. 고인은 지난해 2월부터 연명치료를 중단하고 호스피스 돌봄을 받아오던 중이었으며, 지난 11월에 치러진 미 대선에도 우편투표로 한 표를 행사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1924년 10월1일 땅콩·면화농장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간호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지아공대를 거쳐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그는 2차대전 이후 처음 건조된 잠수함에서 복무했다. 1953년 부친이 사망하자 해군 대위로 전역해 땅콩농장 가업을 잇기 시작한 그는 흑백 분리가 극심했던 당시 민권운동에도 힘을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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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조지아주 상원의원, 1970년 조지아 주지사에 당선된 그는 1976년 대선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 전국적 지명도는 낮았지만, ‘워터게이트’ 여파로 기성 정치인에 대한 불신이 팽배하던 당시 카터 전 대통령은 ‘정직’ ‘선량함’을 키워드로 앞세워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남북전쟁 이후 남부 지방 ‘딥사우스’ 출신이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그가 최초였다. 취임식 연설을 마친 대통령이 백악관까지 이어지는 대로를 도보로 행진하는 전통도 그가 시작했다.

1977년 제39대 미 대통령에 취임한 카터 전 대통령은 인권과 민주주의 확장을 외교 정책의 전면에 내세웠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을 중재해 1978년 9월 중동 평화의 기초를 마련한 ‘캠프 데이비드 협정’ 체결을 이뤄낸 것은 대표적인 외교 성과로 꼽힌다. 1979년 1월엔 중국과 정식으로 수교했다.

그러나 스태그플레이션과 제2차 석유파동에 따른 경제 불황으로 카터 전 대통령은 재임 첫해를 제외하고 20%대의 저조한 지지율을 면치 못했다. 특히 1979년 11월 이란 과격파 학생들이 이란 테헤란 주재 미국대사관을 점거하고 대사관 직원과 그 가족들을 인질로 삼은 사건은 그의 재선 도전에 최대 악재로 작용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1980년 4월 특수부대를 투입해 인질 구출작전을 벌였으나 미군 8명이 숨졌다. 결국 그는 1980년 대선에서 로널드 레이건 공화당 후보에 패배했고, 재선에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백악관을 떠나야 했다.

하지만 퇴임 후 그의 진면목이 발휘됐다. 1982년 카터센터를 설립하고 민주주의·평화·인권 증진, 보건·교육 개선, 불평등 해소에 뛰어들었다. 민주주의 취약국에서 선거감시 활동을 지원했고, 아프리카 전염병 확산 주원인인 기니벌레 퇴치에 매진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내가 마지막 기니벌레 개체보다 오래 살 것”이라며 의지를 보였는데, 실제로 감염 사례가 1986년 350만건에서 2021년 14건으로 급감했다.

빈곤층 주거를 해결하기 위한 해비타트 프로젝트(사랑의 집짓기) 운동도 전개했다. 카터 부부는 허름한 작업복 차림에 직접 연장을 들고 벽돌을 쌓거나 집을 수리했다. 부부의 손길이 닿은 집은 무려 14개국 4400채에 이른다. 그는 2002년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과 민주주의·인권 신장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한국과도 각별한 인연이 있다. 대선 후보 시절 박정희 독재정권의 인권 탄압을 문제 삼아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한 그는 취임 후 주한미군 4~5년 내 철군 및 전술핵 철수 계획을 제시했다. 1979년 7월 방한 당시 회담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 미군 철군에 강력히 반대하자 한국의 자체 국방비 확충과 긴급조치 9호 해제 등 인권 개선을 요구하며 설전을 벌였다. 한·미 동맹 역사상 최악의 정상회담이자, 양국 관계 긴장이 파국 직전까지 고조됐던 순간이었다. 결국 의회와 군의 반대에 부딪혀 철군 구상은 주한미군 3600명 감축에서 끝났다. 인권 외교를 앞세웠던 카터 행정부는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이 암살된 이후 신군부를 사실상 용인해 논란을 자초했다.

국제분쟁 해결에 열의를 보인 그에겐 북한 핵 문제 해결과 한반도 평화도 중요한 과업이었다. 그는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로 북핵 1차 위기가 고조된 1994년 6월 평양을 찾아 김일성 주석과 두 차례 면담하고, 북한의 핵개발 동결과 국제원자력기구(IAEA) 특별사찰 수용을 이끌어냈다. 대북제재·압박을 강화하던 빌 클린턴 당시 미 행정부 기조에서 다소 어긋난다는 지적도 나왔지만,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은 북·미 고위급 대화와 그해 10월 제네바합의 체결로 이어졌다.

특히 그가 김 주석에게 김영삼 당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제안해 1994년 7월 말 남북이 분단 이후 첫 남북 정상회담을 갖기로 하면서 화해 무드가 조성됐다. 하지만 7월8일 김 주석이 사망하면서 남북 정상회담은 무산됐다. 2010년과 2011년에도 그는 억류된 미국인 석방 교섭을 위해 방북했으나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과 회담하지 못했다.

카터 전 대통령이 퇴임 후 보여준 소박하고도 헌신적인 행보는 그를 미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위대한 미국 전직 대통령’의 반열에 오르게 했다.

백악관에서 나와 아내 로절린과 함께 고향 플레인스의 사저로 돌아간 그는 생의 마지막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지난해 11월 아내가 96세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한 번도 부유해지고 싶다는 욕망을 가진 적이 없다”던 카터 전 대통령은 고액 강의료를 받는 연설이나 기업 이사직을 마다한 채 공익 활동에 투신했다. 카터 전 대통령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진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추도사를 한다.

워싱턴 | 김유진 특파원 yj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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