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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1 (수)

[지금, 여기]존재의 소멸을 가져오는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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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미국에서 발표된 ‘빈티지 시즌(vintage season)’이라는 단편소설이 있다. 5월 어느 날 주인공 집에 지나치게 세련되고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하는 이방인들이 찾아와 한동안 집을 빌려 머물기로 계약한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이방인이 찾아와 시가의 3배 가격을 제시하며 당장 이 집을 사겠다고 한다. 5월 말이 다가올수록 점점 더 많은 방문객이 이곳을 찾아든다. 나중에 밝혀진 이들의 정체는, 최적의 시기에 최고의 스폿에서 역사적 스펙터클을 즐기려고 옮겨 다니는 시간여행자 관광객들이었다. 지금 이곳에 몰려든 것도 임박한 재난을 앞두고 가장 구경하기 좋은 명당을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형 운석이 근처 마을에 떨어지고 이 집을 제외한 모든 것이 불타오르며 폐허가 된다. 잔혹한 대장관을 감상한 이들은 이제 화려하기로 명성이 자자한 9세기 샤를마뉴 황제의 대관식을 구경하러 다시 길을 떠난다.

오래전에 읽었던 이 소설을 떠올린 것은 지난 한 달 동안 내가 시간여행자가 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책으로, 영화로 알고 있던 과거의 그 현장이 내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펼쳐지고 있다니! 그러나 소설 속 시간여행자들처럼 순수하지만 잔인한 호기심과 경이(驚異)로 이 시간을 ‘즐길’ 수는 없었다. 12월3일 밤, 스스로의 눈과 귀를 의심하며 밤을 지새우고 더 이상 놀랄 일은 없을 줄 알았건만, 아직 우리에게는 준비된 깜짝쇼가 많이 남아 있다는 듯 기행(奇行)의 강도를 높여가는 내란 세력을 보니 시간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다. 5000만명이 생방송으로 지켜본 무력 폭동을 두고도 내란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내란 주동자들과 그들을 감싸고 국민에게 사과 한마디 없는 여당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1980년대 광주를 떠올렸다. 모두가 진실을 알고 있는 지금도 저 모양인데, 학살의 역사를 지우고 감히 ‘민주정의’를 입에 올렸던 저들을 광주 시민들은 대체 어떻게 견뎌온 것일까?

이 답답한 시간여행의 그나마 소득이라면, 많은 이들이 내란 세력의 뿌리가 무엇인지, 지배 엘리트가 진짜 ‘엘리트’이기는 한 것인지 그 실체를 분명히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서울대와 육군사관학교 같은 소위 일류 학교를 졸업하고도 무속과 점술, 허황된 선동에 사로잡혀 있을 뿐 아니라, 그토록 잘났으면 콧대를 높이고 꼿꼿하기라도 해야 하는데 권력 앞에서 바람보다 먼저 눕는 한 포기 가련한 풀잎처럼 행동하고 있다. 내란 옹호 당론에 반대한다는 국회의원이 “선배님 죄송합니다” 푯말을 걸고, 선배 의원이랍시고 취재진이 옆에 있든 말든 반말로 ‘훈계’씩이나 하는 모습은 타임머신이 대체 어느 시대로 우리를 잘못 데려간 것인지 궁금하게 만든다. 경제가 흔들리고 사람들의 삶이 위태로워지든 말든, 그들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다음 선거와 난데없는 ‘이재명’뿐이다. 이 정도면 집착이고 사랑이다. 엘리트 군인들이 각자 부대의 명예를 걸고 초인적 경쟁을 벌이는 서바이벌 예능, 성격은 괴팍하지만 본업에 누구보다 진심인 검사, 정보요원들이 정의를 실현하는 영화와 드라마도 이제 우습게 되었다. 시민에게 총구를 겨누고, 롯데리아에서 내란을 모의하고, 편파수사에 댓글 공작이나 일삼는 리얼리즘을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겠나.

한국의 보수 엘리트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 같은 거창한 기대는 애초에 없었다. 그저 보통 시민들이 가진 근대적 합리성과 공동체 윤리의식만이라도 갖추기를 바랐을 뿐이다. 그런데 너무 무능하고, 너무 몰염치하다. 자유당과 유신 세력의 혈통을 계승하면서 광주의 피를 온몸에 뒤집어쓰고 태어난 민정당은 민주자유당, 신한국당, 한나라당, 새누리당, 국민의힘에 이르기까지, 영생을 누리는 뱀파이어처럼 신분을 바꿔가며 군사쿠데타와 내란, 민주주의 유린을 반복적으로 저질러왔다. 이젠 안녕. 밝은 빛으로 이들의 존재를 소멸시킬 때가 되었다.

경향신문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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