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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4 (토)

[여적] 희망의 을사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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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씨년스럽다’는 뭔가 어감부터 스산함이 느껴지는 말이다. 사전적 의미도 ‘날씨나 분위기가 몹시 스산하고 쓸쓸한 데가 있다’이다. ‘을사(乙巳)년’에 나라에 좋지 않은 일이 있었고, 그 뒤로 사람들이 ‘을사년스럽다’고 한 데서 비롯됐다고 전해진다. 을씨년스럽다는 말은 결국 민중의 관점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좋지 않은 일이 외침이나 자연재해로 인한 것이든, 위정자의 실정으로 벌어졌든 그 고통과 치욕은 대부분 민중의 몫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기억에 가장 강하게 남아 있는 을사년은 1905년이다. 조선이 일본 제국주의 세력에 외교권을 빼앗긴 을사조약(제2차 한일협약)이 있었던 해이다. 고종이 일본의 강압에 억지로 조약에 서명했다는 점에서 을사늑약(勒約)이라고도 한다. 일본은 1904년 시작한 러일전쟁의 우세 속에 미국, 영국, 러시아 등 열강의 승인을 얻어 결국 조선을 보호국화하려 했다. 그해 11월17일 어전회의에서 한규설, 민영기, 이하영을 제외한 5명의 대신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이 찬성을 표하며 결국 그 목표를 달성했다.

정확히 대응하진 않지만, 지난해 12·3 내란 직전 국무회의를 떠올리게 된다. 국무위원들은 내란 사태 직후 사나흘간 국무회의 참석 여부조차 함구하며 언론을 피해다니다가 분위기가 확연히 기울자 입을 맞춘 듯 ‘절차적 흠결이 있었다’ ‘나는 반대했다’고 말했다. 대부분 국민들은 이들의 행태를 마뜩잖게 바라봤다. 경찰 수사가 진행 중이니 당일의 진상이 드러날 것이다.

내란 사태에 이어 충격적이고 가슴 아픈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로 지난 한 해를 마무리하고, 을씨년스러운 한 해의 시작을 맞게 됐다. 하지만 이번 을사년도 그래야 한다는 법은 없다. 10천간에서 을(乙)은 ‘나무, 부드러움, 젊은이, 푸른색’을, 12지지에서 뱀은 ‘지혜롭고 신중한 동물, 새로운 시작’을 상징한다고 한다. 당면한 내란 상황을 극복하고 새로운 정치 질서와 사회 만들기를 차근차근 병행한다면 본래 의미에 가까운 을사년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120년 뒤에는 긍정적 의미의 ‘을사년답다’라는 말이 ‘을씨년스럽다’를 밀어내고 더 많이 쓰일 수 있기를 기원한다.

경향신문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사흘째인 지난해 12월31일 전남 무안공항 사고 현장 너머로 해가 뜨고 있다. 이준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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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제민 논설위원 jeje1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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