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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8 (토)

발트해 해저 케이블 손상, 러 ‘그림자 선단’ 연루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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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지난 26일 핀란드 국경수비대가 공개한 발트해 포르칼라니에미(Porkkalanniemi) 외곽 지역에 떠 있는 조선 이글 S의 모습. /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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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에스토니아를 잇는 발트해에서 지난 25일 해저 전력 케이블이 손상돼 일부 지역에서 전기가 끊겼다. 이 사고 원인으로 핀란드 정부는 러시아가 2022년 초 우크라이나 침공 후 운영해 온 이른바 ‘그림자 선단(船團)’을 지목하고 본격 조사에 착수했다고 26일 발표했다.

그림자 선단은 서방 제재를 받아 정상적으로 석유 수출을 할 수 없는 러시아가 암암리에 운영하는 선박들을 뜻한다. 가봉, 파나마, 쿡 제도(뉴질랜드령) 등 선박 규제가 허술한 국가의 국기를 달고 러시아 석유 수출에 이용된다. 이 배들은 제대로 보험 가입도 할 수가 없어 해양 사고를 내더라도 피해국이 보상받기 어렵다. 러시아는 건조(建造)한 지 15년이 넘는 노후 유조선을 중심으로 약 600척 규모의 그림자 선단을 운영 중이라고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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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이철원


핀란드와 에스토니아 및 독일을 잇는 해저 통신 전력 케이블인 ‘에스트링크 2′가 손상된 후 핀란드 경찰과 국경 경비대는 인근에서 운항 중이던 유조선 ‘이글S’를 억류하고 승무원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핀란드 수사 당국은 이 배의 형식적 국적이 쿡 제도이지만, 사실은 러시아가 운영하는 그림자 선단 소속으로 보고 있다. 핀란드는 이 배가 케이블을 우발적으로 훼손한 것인지 고의적으로 파괴한 것인지 등을 집중 조사할 계획이다. 이글S는 무연 휘발유 3만5000t을 싣고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집트 포트사이드로 향하고 있었다.

러시아 그림자 선단의 활동은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 이후 계속 늘어왔다. 미국·유럽연합(EU) 등 서방국 주도로 러시아에 경제 제재를 하면서 러시아 경제의 버팀목이었던 석유 수출에도 차질이 빚어졌다. 서방국은 러시아산 석유 수출을 완전히 막을 경우 공급 부족으로 유가가 오를 위험이 있다고 보고, 러시아 원유 가격의 수입가를 시장가보다 훨씬 낮은 ‘배럴당 60달러’ 이하로 묶어두는 방식으로 제재해 왔다. 서방국들은 아울러 금융 제재를 통해 러시아 선박에 대한 서방권 보험사들의 선박 보험 수주도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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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현지시각) 핀란드만 포르칼란니에미 해역 외곽에서 핀란드 국경수비대 정찰선 투르바호(앞쪽 배)가 러시아 그림자 선단 소속으로 추정되는 유조선 이글S(뒤쪽 배) 근처를 순찰하고 있다. 핀란드 정부는 전날 해저 전력 케이블 ‘에스트링크 2′ 손상과 이글 S의 상관관계에 대해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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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손해 보고 석유를 파는 대신, 제재에 동참하지 않는 인도·중국 등에 사실상 무보험인 다른 국적의 그림자 선단을 운영하는 방식으로 석유를 수출해 왔다. 과거 비슷한 제재를 받은 이란·베네수엘라 등이 썼던 ‘꼼수’와 비슷한 방식이다. 우크라이나 ‘키이우 경제학연구소’에 따르면 중국·인도 등이 비교적 싼 러시아 석유 수입을 늘리면서 그림자 선단을 통한 러시아 석유 수출은 2022년 4월 하루 평균 117만4000배럴에서 지난 6월 414만배럴로 크게 늘었다.

러시아의 그림자 선단 규모가 확대되고 활동 범위도 넓어지면서 해양 전문가들 사이에선 “선단의 주축을 이루는 노후 유조선이 정상적으로 관리를 받지 못해 대규모 해양 사고 발생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는 경고가 잇따랐다. 대표적인 것이 남중국해에서 침몰한 파블로호 사고다. 지난해 5월 말레이시아 풀라우 팅기섬 인근 남중국해 해상에서 아프리카 가봉 선적의 유조선 파블로호에서 화재가 발생해 선원 세 명이 실종(사망 추정)되고 배는 폭발했다. 이 배는 1997년에 건조돼 사용 기간을 한참 넘겼고, 보험 등 기록이 전혀 없었으며, 소유주가 누구인지는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이 배는 러시아 그림자 선단의 일원으로 러시아 원유를 중국에서 하역하고 돌아가던 중이었다고 추정된다. 이번 전력 케이블 손상은 러시아 그림자 선단의 규모가 커지면서 이런 사고 가능성이 더 커지고 있다는 신호라고 뉴욕타임스는 보도했다.

일각에선 러시아가 그림자 선단을 단순한 석유 밀거래에만 활용하는 것을 넘어, 서방국의 중요 기반 시설을 파괴하는 무기로 악용하고 있다는 의혹도 제기한다. 이번 사고도 이글S가 해저 케이블 인근에서 일부러 닻을 내리고 천천히 운항했다는 정황이 드러나는 상황이다. 키이우 경제학연구소는 지난달 발표한 보고서에서 “러시아 그림자 선단의 낡은 배가 좌초하거나 파괴돼 대규모 석유 유출 해양 사고가 발생할 경우 보험 가입도 되지 않은 이 배들엔 책임을 물을 수 없을 것”이라며 “선박을 등록한 국가가 책임 있게 선박 안전 관리를 하도록 국제사회의 규제가 강화돼야 한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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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휘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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