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남태령 일대에서 막힌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의 트랙터가 경찰버스로 막혀 있다. 김혜윤 기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윤석열 대통령의 구속을 촉구하며 트랙터 등을 몰고 상경 시위에 나선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의 ‘전봉준 투쟁단’은 지난 21일 밤 경기도와 서울을 잇는 남태령 고개에서 경찰에 가로막혔다. 농민들이 고갯마루 칼바람과 어둠 속에 몇시간째 갇혀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수많은 시민들이 한걸음에 달려와 차가운 아스팔트에 앉아 노래하며 함께 밤을 보냈다. 전남 강진군 농민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강광석씨가 여느 겨울밤과 다를 바 없이 추웠던, 하지만 그 어느 겨울밤보다 뜨거웠던 이날의 감동을 에스엔에스에 전했다. 본인의 허락을 받아 전문을 싣는다.
21일, 수원의 아침은 몹시 추웠다. 전남 구례에서 올라온 트랙터 한 대는 눈길 가파른 경사로 발판을 내려오다 전복되었다. 사람은 다치지 않았다. 출발 전에 “가자 서울로, 윤석열 체포하고 농민헌법 쟁취하자”고 앞에서 외쳤고 뒤에서는 “혹시 경찰이 막으면 남태령일 거야”라고 누군가 말했다. 트랙터는 총 37대였다. 나는 앞 트랙터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뒤 트랙터에 밀려가는 것 같았다. 중간에 잠깐 쉬면서 생밤 몇 개를 나누어 먹었다. 트랙터 속도는 느려졌고 드문드문 경찰이 보였다. 이제 막는구나, 생각했다. 남태령이었다.
몇몇 시민은 스케치북에 ‘멋져요, 파이팅’을 적어와 응원했다. 지나는 길마다 사람들이 사진을 찍었는데 나는 그때마다 약간 결연한 표정을 지어 보이려 애썼다. 차 안에서 손을 흔드는 사람, 차 안에서 박수치는 사람. 차 안에서 손가락 욕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편에서 보는 사람들은 저편으로 흘러가는 사람들인데, 만난 일 없고, 만날 날 없을 텐데, 같은 고장에 사는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경찰의 진은 남태령을 넘어서 경사면에 위치했다. 오후 2시였다. 서울로 가는 차선과 서울에서 나오는 차선에는 중앙분리대가 없이 30cm 높이의 보도블록이 경계선을 만들고 있었다. 성질 급한 트랙터 한 대가 그곳을 넘어 반대 차선으로 뛰어들어 세 대가 연달아 경찰의 저지선을 넘었다. 경찰은 반대 차선도 차벽으로 급히 막았는데 네 대는 이미 현장을 벗어나 동작대교와 반포대교로 진출했다. 그들은 막힌 자리에 트랙터를 놓고 돌아와서는 ‘대열을 이탈하니 경찰도 막지 않고 갈 데가 딱히 없어서 너무 힘들었다’고 말했다.
21일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로 향하던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회원과 트랙터 30여대, 화물차 50여대가 서초구 남태령 일대에서 경찰에 가로막히자, 시민들이 연대해 밤샘 대치를 이어갔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남태령 양방향 도로는 완전히 차단되었다. 첩첩산중이며 고립무원이며 진퇴양난이며 속수무책이었기 때문에 남태령은 대열이 살거나 죽을 자리였다. 오후 해가 가파르게 졌다. 령은 양쪽 높은 봉우리 중간에 있었다. 령은 서울의 길목이며 산을 낀 수도방위사령부 철책은 삼엄했다. 그곳이 1980년에 노태우가 사단장이었다는 사실, 이번 쿠데타에서는 지하 벙커에 잡아온 정치인을 가두려고 했다는 사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배는 계속 고팠다. 빵과 떡이 일부 돌았으나 그것도 바닥났다. 인근에 상점은 없었다. 령을 넘어가려는 바람의 숨소리는 거칠어서 사람들은 밖에 나오지 않고 트랙터에 안에서 시동을 켜놓고 시간을 보냈다. 내 트랙터는 히터가 나오지 않았다. ‘아 여기서도 춥고 배고픔에는 계급이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저녁 7시쯤 경찰 10개 중대가 견인차, 지게차를 앞세우고 진압하러 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들어내려고 하는구나’ 경찰이 들어내려면 못할 것도 없지만 이대로 허무하게 끝내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트랙터를 견인하려면 기어를 빼야 하는데 기어를 넣은 상태에서 열쇠를 빼면 그들은 바퀴가 구르지 않는 트랙터를 사지를 묶어 끌고 가야 한다. 그러면 클러치 박스와 미션이 다 아작난다’고 누가 말했다. 일부는 그렇게라도 버티면서 진을 사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각자가 트랙터에서 시동을 끄고 열쇠를 주머니에 넣었다.
회의가 열렸다. 현재 상황은 진(進)의 길은 없고 퇴(退)의 길은 열려있다고 했다. 척화파와 주화파가 논쟁을 하듯 간부들은 명분과 현실 앞에서 흔들렸다. 오히려 간부가 아닌 사람들이, 평소에 조용한 사람들이, 간만에 참석한 사람들이 목소리를 냈다. “아따 눈들이 많은디 여기서 우리가 빠지면 쓰겄는가, 쪽팔리게.” 그것은 명분도 실리도 아닌 체면과 양심이었다. 죽되든 밥되든 버틴다고 결정했다.
따뜻한 떡볶이가 왔다. 시민이 보내준 것이라고 했는데 두 그릇을 먹었다. 조금 있으니 김밥이 왔다. 있을 때 먹어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시 먹었다. 핫팩이 왔다. 핫팩에는 군인이 근무를 서는 사진이 있었다. 여기가 그들이 지키는 고지와 같다고 생각했다. 경찰은 저녁이 되어서 시민들이 모두 자리를 뜨면 들어내려고 하는구나, 언론이 없을 때 들어내려고 하는구나 생각했다. 결과는 말하지 않아도 예측 가능한 것이었다.
2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남태령 일대에서 막힌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의 트랙터 행렬에 시민들이 함께 하고 있다. 지난 21일 서울 한남동 대통령관저로 향하던 전농 회원과 트랙터 30여대와 화물차 50여대가 서초구 남태령 일대에서 가로 막혀 시민들과 함께 밤새 대치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여덟시가 지나자 광화문에 있는 시민들이 여기로 올 수도 있다는 말이 돌았다. 늦은 시간에 누가 온다는 것은 우리를 구하는 일인데 그런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아홉시가 되자 트랙터 옆에 삼삼오오 사람이 보이더니 점점 사람이 많아져서 앞사람은 앉으라더니 더 큰 앰프를 행사장에 가져온다고 말하더니 노래가 나오고 사람들이 미치고 노래는 더 커지고 저녁 10시가 되자 대열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이제 사람들은 한 5천명, 아니 만명, 숫자는 가늠되지 않았다. 꾸역꾸역 느릿느릿 무장무장 밀물이 뭍을 압박하듯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나는 그곳 가까운 곳에 지하철이 있는지도 몰랐다. 이제 열한시면 지하철이 끊긴다고 사람들이 말했다. 바람 차가운 령에서, 군인들도 서 있기 어려운 이 추운 고지에서 젊은 사람들이 버틴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10시가 넘자 사회자가 걱정된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곧 지하철이 끊기면 이곳은 올 수도 없고 나갈 수 없는 곳이 됩니다. 어찌합니까?” 어떤 사람이 마이크를 잡고 말했던 것 같다. “멀리서 오신 분들이 여기서 이 고생을 하는데 혼자 있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박수가 터져 나왔고 그렇게 밤샘 농성은 만장일치로 결정되었다.
이때부터 응원봉이 바다를 이루었다. 바다 빛은 서로 다르면서 하나였다. 네모, 동그라미, 세모였고 파란빛, 빨간빛, 노란빛이었다. 손잡이 길이도 짧은 것과 긴 것이 있었다. 물어보니 가격도 달랐다. 왜 그런 것까지 물어보냐고 웃은 사람들도 있었으나 나는 합리적 추론이 가능한 통계를 확보하기 위해 부끄럼을 무릅쓰고 여기저기 물어보았다. 최저 가격이 3만원이었고 최고 가격이 10만원이었다. 그들 대개 젊거나 어린 여성들이었는데 모르는 노래가 없었고 지칠 줄 몰랐고 준비성도 좋아서 모자와 마스크, 목도리와 방한 숄더, 돗자리와 장갑, 작고 엷은 이불로 몸을 감쌌다.
내란죄 피의자 윤석열 대통령의 구속을 촉구하며 트랙터·화물트럭 등을 타고 상경하던 전국농민회총연맹 전봉준투쟁단을 경찰이 막았다는 소식을 들은 시민들이 22일 오전 서울 관악구 과천대로 남태령고개 인근에 모여 경찰에 철수를 촉구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나는 그들의 음악을 유심히 들었는데 ‘티어스’와 ‘밤이면 밤마다’ ‘여행을 떠나요’ ‘남행열차’ ‘질풍가도’ ‘다만세’와 로제의 ‘아파트’와 윤수일의 ‘아파트’와 BTS 등을 불렀고…. 여기에 적지 못한 노래가 더 많다. 김연자의 ‘아모르 파티’도 불렀는데 기가 막힌 것은 노래를 부르면서 구호를 외친다는 것이었다. 가사와 가사 사이, 시로 말하면 1연과 2연 사이에 불과 1, 2초 간격에 ‘탄핵 탄핵 윤석열 탄핵’과 ‘차빼라, 차빼라’를 떼창했는데 원래 그 노래에 그 가사가 생겨먹은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집회 사회자라 하기는 어렵고 무슨 DJ라고 해야 할 주관자는 노래마다 타이밍을 기가 막히게 찾아내 떼창을 유도했는데 실로 이것은 경이로운 사태였다. 그들은 밤새웠고 그것을 보는 농민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고 보고 싶어서 들어가지도 못했다. 이것은 한 개의 나락이 160개의 알곡이 되는 일보다 놀라웠다. 그들은 노래하며 춤추고 말하고 한숨 쉬고 야유하고 환호했다. 처단할 것을 결의하고 울지 말라고 위로했다.
그들은 순서대로 발언대에 올라 3분을 말했는데 그러기 위해 세 시간을 기다렸다. 수학을 가르치는 학원 강사, 초등학교 교사, 농업을 공부하는 대학원생, 광주에 사는 롯데 팬, 전라도 혐오 때문에 괴로운 대학생, 이번에 수능을 본 재수생, 자신이 농업지대에 산다는 학생, 부산에서 주말마다 올라온다는 24살 여성, 수방사에서 군인으로 근무한 아버지를 둔 직장인, 아들을 군대에 보낸 여성, 대학을 가기 위해 뒤늦게 수능준비를 한다는 30대 여성, 취직이 걱정인 4학년 여학생, 대학 총학생회 활동을 하는 성소수자 남성, 이태원 참사에서 희생당한 친구를 둔 여성, 양평에서 아버지가 농사짓는다는 직장인을 따라온 양평에서 혼자 농사짓는 여성, 농민운동가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연단에 선 고 신용범의 딸 신우리, 집회장의 천연기념물이 되었다는 20대 남성, 특성화고를 졸업하고 노조운동을 한다는 21살 여성 등이 말했다. 그들의 말잔치는 끝이 없었고 박수의 가열참은 겨울 공기를 뚫었다.
농민의 고통을 이해한다고, 양곡법을 거부한 것에 분노한다고, 국산 쌀밥 먹는 경찰은 부끄럽지 않냐고, 국민의힘의 콘크리트 지지율은 이제 깨진다고, 민주주의는 광장에 있다고, 정치를 바꾸어야 한다고, 전봉준 티셔츠를 입고 다니겠다고 말했는데 집회 때마다 큰 소리로 현 시국을 개탄하는 민주단체 지도자들보다 말을 잘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핸드폰으로 자신들이 할 말을 적어왔는데 발언의 마무리를 구호로 하는 것은 일종의 유행처럼 되어가는 것 같았다. “나라는 2030 여성을 버렸지만 2030 여성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는 말을 듣고 나는 나라가 부끄러웠고 나라의 미래를 보았다.
나는 22일 일요일 새벽 4시를 잊을 수 없다. 민중가수 최도은은 활화산이었고 불화살이었다. 최도은은 음악도 없이 불나비를 불렀는데 입때껏 그런 날 것 같은 포효를 본 적 없다. 맥박도 핏줄도 터지는 것 같았다. 그들은 ‘임을 위한 행진곡’과 ‘농민가’를 떼창했다. 삼천만 잠들었을 때 몇 사람 깨워서 서울로 향했던 우리는 그들이 부르는 진리와 죽은 자가 갔던 길과 밝은 태양 솟아오르는 산자의 길을 생각했다. 우금치에서 죽은 자의 몸 위에 포개진 산자의 몸과 80년 5월27일 전남 도청의 ‘동호’의 마지막 밤을 생각하며 나는 울었다.
나는 연민과 분노를 생각했다. 여성,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장애인, 농민, 특성화고 출신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통을 직시하려는 마음, 타인의 배고픔과 추위를 외면하지 않는 마음, 차별과 배제의 고통에 함께하려는 마음이 인간의 마음이며 인간의 마을에 피어나는 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들의 얼굴에서 세월호 아이들을 보았다. 세월호 아이들이 그 자리에 왔다고 굳게 믿었다. 죽은 자가 산자의 길을 열었다고 믿었다. 하늘의 별이 된 그들의 영혼이, 배에 남긴 마지막 손톱자국이, 그들의 호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지상에 내려와 응원봉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세월호 이전의 세상과 이후의 세상은 달라야 한다는 다짐들이 저들의 가슴속에서 분노의 꽃을 피웠다고 생각했다. 찬 바다에서 죽은 사람도 있는데 이깟 겨울 하룻밤이 무슨 대수냐며, 그들은 인류의 역사는 잔인하기 짝이 없는 인간과 아름답기 그지없는 인간의 투쟁이라는 사실을 몸으로 보여주었다.
나는 22일 일요일 새벽 4시 남태령에서 여명을 보았고 승리를 확신했고 세월호의 부활을 보았다. 그 후로부터는 경찰벽을 넘는 것도, 한강을 넘은 것도, 윤석열 자리의 턱밑까지 압박한 것도 이미 되어질 길이었다.
체면과 양심이 대열을 분산의 길에서 구했고 연민과 분노가 트랙터의 길을 열었다. 나는 불량한 자들의 시대가 가고 인간이고 싶은 이들의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직감했다. 나는 저들의 형식의 가벼움과 내용의 무거움을 이해하려 애썼다. 나는 저들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 농사를 더 열심히 짓고 싶어졌다.
▶▶한겨레는 함께 민주주의를 지키겠습니다 [한겨레후원]
▶▶실시간 뉴스, ‘한겨레 텔레그램 뉴스봇’과 함께!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