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2.23 (월)

[단독] "수입 적어 강제 주7일" "강남 방세만 54만원" 외국인 가사관리사 현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중소기업중앙회 조사 결과]
월 실수령 112만원, '서울 고물가' 빠듯
본국에 보낼 돈 없어 가족 생계 걱정도
출퇴근에 4시간...점심 먹을 새도 없어
한국일보

외국인 가사관리사 시범사업에 참여하는 필리핀 노동자들이 지난 8월 6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서 입국하고 있다. 이들은 올해 9월 3일부터 서울 시내 가정 140여 곳에서 일을 시작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평일 근무가 길지 않아) 수입이 너무 적다 보니까 어쩔 수 없이 주말에도 일해야 합니다. 일주일 내내 쉬는 날이 없어요."

"(강남) 기숙사비만 53만9,000원이라 너무 비싸요. 받는 월급에 비해 도심 속 생활비가 비싸서 통장에 남는 돈이 없습니다. 본국에 있는 가족들 생활이 너무 걱정돼요."

올해 9월부터 '외국인 가사관리사'로 일한 필리핀 노동자들의 '근무 소회' 중 일부다. 해당 시범사업 시행 전부터 일각에서 이들에게 '최저임금 적용을 제외하자'는 주장을 내놨으나, 실상 필리핀 돌봄노동자들은 서울의 고물가 탓에 '본국 송금'은커녕 먹고살 생활비만 겨우 남기는 실정인 것이다.

최저임금 차등 적용? "지금 월급도 적다"

한국일보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지난해 7월 31일 서울 중구 로얄호텔에서 고용노동부 주최로 열린 외국인 가사근로자 도입 시범 사업 관련 공청회를 찾아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참가자들은 외국인 가사근로자 도입 정책이 이주 여성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합법화하면서도 이들이 성폭력 등으로부터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노동권은 보장하지 못하고, 보편적인 가사돌봄 필요를 외면하는 정책이라며 정부의 시범사업 추진 강행과 공청회 개최를 규탄했다. 뉴스1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22일 한국일보가 입수한 '필리핀 가사관리사 만족도 등 조사 결과' 문건엔, 필리핀 가사관리사들의 불만 사례들이 생생하게 나와 있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지난 10월 초 조사한 내용이다. 9월 일을 시작한 후 100명 중 2명이 "과로로 어려움을 겪었다"(필리핀 정부 설명)며 숙소에서 무단이탈한 사건이 발생하자, 중기중앙회가 현장 여론 수렴차 해당 조사를 실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조사 결과를 보면, 필리핀 가사관리사들은 서울 강남구 소재 1평 남짓 단칸방에 살면서 방세로 월 53만9,000원을 내는 것으로 확인됐다. 노동자들은 "숙소는 드나들기도 너무 좁다", "기숙사비가 너무 비싸다", "월급 자체는 만족하지만 기숙사비, 교통비, 음식 및 필요 비용이 전부 본인 부담이라 월급에서 남는 게 없다", "낮은 월급이라 마음이 힘들다"고 토로했다.

실제 한 가사관리사의 9월 월급명세서를 보면 월급 약 183만 원 중 40%에 가까운 약 71만 원이 각종 항목으로 공제됐다. 공제비용 중 53만9,000원이 숙소비, 3만3,000원은 통신비, 나머지는 소득세와 사회보험 등이었다. 실수령액인 약 112만 원으로 서울 도심에서 한 달 식비, 근무지 이동 교통비, 각종 생활비를 지출해야 하는 것이다.

"혼자 (한국에) 와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는 본인 버는 것의 80%는 본국에 송금한다"(나경원 국민의힘 의원), "(한국의) 인건비 수준은 (본국의) 몇 배나 된다"(오세훈 서울시장)며 최저임금 차등 적용 필요성을 강변한 일부 정치인들 주장과 현실은 너무 달랐다.

"휴식 없이 5개 방 청소·빨래···눈물 나와"

한국일보

외국인 가사관리사 시범사업에 참여하는 필리핀 노동자들이 지난 8월 6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서 입국하고 있다. 이들은 입국 후 4주간 특화교육을 받은 후 9월 3일부터 서울 시내 가정 140여 곳에서 정식 근무를 시작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들이 처한 업무 환경도 열악하고, 기대와 다르다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점심 먹을 시간도 없어 근무지 이동 중에 공원이나 지하철역에서 급하게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우고, 매일 출퇴근 시간도 왕복 4시간이 넘는 경우도 있었다. 여러 가구를 방문하며 일하다 보니 출퇴근 시간에 너무 많은 시간과 체력이 소모된다는 의견도 많았다. 직무 가이드라인 내 업무 범위를 벗어나는 과도한 일을 이용자 가구에서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특히 시범사업 시행 전부터 논란을 부른 '업무 범위', 즉 가사노동 수행 범위를 두고 현장 혼란과 불만은 커 보였다. 앞서 필리핀 정부는 "송출한 인력은 가사도우미(헬퍼·Helper)가 아닌 숙련된 돌봄제공자(Care giver)"라며 집안일은 아이 돌봄과 관련된 것에 한해 제한적으로 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힌 반면, 한국 정부는 아이 돌봄과 가사 모두 가능한 인력인 것처럼 홍보해왔다.

한 노동자는 "돌봄제공자(Caregiver)라고 듣고 왔는데, 생각과 너무 다르다. 집에 거실과 주방, 방 5개 청소에 빨래와 손세탁 등 업무량이 너무 많았다. 8시간 내리 쉬는 시간 없이 일해야 하니 눈물이 나올 정도로 힘들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스스로 활동하기 어려운 아이들, 환자나 고령 노인을 돌보는 일로 알고 왔는데, 한국에 와서 집안일을 하려니 당황스럽기만 하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이번 조사는 통계적인 수치를 낼 수 있는 전수조사는 아니고 사례 위주의 조사여서 보다 면밀한 후속 조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제대로 사업 평가 않고 내년 규모 늘리나

한국일보

노동건강연대, 민주노총, 이주노동자노동조합 등 노동시민단체 관계자들이 지난 9월 26일 서울시청 앞에서 '이주 가사돌봄노동자 권리 보장을 위한 연대회의' 출범 기자회견을 열고 '외국인 가사관리사 시범사업'을 시행 중인 서울시에게 가사돌봄노동자들의 권리 보장을 촉구하고 있다. 하상윤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상황이 이런데도 6개월 시범사업 평가를 하기도 전에 정부는 해당 사업의 전국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지난달 22일 '고용허가제 중앙·지방협의회'를 열고 내년 본사업 시행을 위해, 외국인 가사관리사 도입을 원하는 지방자치단체는 이달 27일까지 회신해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본사업 규모는 1,200명이다.

노동계와 시민사회에서는 애초 해당 사업의 설계와 방향이 잘못됐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한국노총은 '세계 이주민의 날'이었던 지난 18일 "무분별한 이주노동자 정책은 고스란히 내국인 노동자의 고용과 노동조건에 악영향을 미친다"면서 "국내 가사서비스업은 저임금의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기피 업종이 된 지 오래됐지만, 서울시는 내국인 가사노동자의 임금 및 노동조건 개선을 외면한 채 필리핀 가사노동자로 대처했다"고 지적했다. 외국인 노동자 착취 논란은 물론 내국인 노동자 처우 악화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취지다.

저출생 완화라는 목표에 부합하는지에 대한 지표도 없다. 시범사업 신청 가구의 절반, 선정 가구 3분의 1이 강남 4구 가구라는 점이 알려지면서 '강남 부모들만 노난 정책'이라는 비판도 나왔다.

최나실 기자 verite@hankookilbo.com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