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정부, 삼청동 한 곳만 남겨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적극 활용
尹, 안가에서 비상계엄 모의 정황
"군사정권 잔재 청산해야" 지적도
1979년 서울 궁정동 안가에서 벌어진 10·26 사건을 다룬 영화 '남산의 부장들'(2020)의 한 장면. 쇼박스 유튜브 화면 캡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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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불법계엄 당시 최전선은 서울 여의도 국회였다. 국회는 윤석열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을 해제할 수 있는 유일한 헌법기관이었기에, 통제를 위해 계엄군과 경찰이 최우선 투입됐다. 이들을 막기 위해 한밤중 국회로 달려간 시민들의 저항에 힘입어 국회의원 190명이 본회의를 열고 계엄 해제 요구안을 가결한 결과, 윤 대통령의 불법계엄은 6시간 만에 끝났다. 국회가 민주주의 수호의 최후 보루로서 다시 한번 역사에 기록된 순간이었다.
같은 날 다른 의미로 역사에 기록된 또 하나의 공간이 있었다. 서울 삼청동에 있는 대통령 '안전가옥(安全家屋·안가)'이다. 윤 대통령은 계엄 선포 3시간 전 이곳에서 조지호 경찰청장과 김봉식 서울경찰청장을 비밀리에 만나 계엄을 모의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소수의 최고 권력층이 밀실에 모여 민주주의 탄압을 논의했다는 점에서 안가는 국회와 정반대 기능을 했다. '군사정권의 잔재'로 평가되는 '안가 정치'가 근절되지 못한 사실이 재확인되면서 개선 필요성이 대두될 것으로 보인다.
10·26 사건으로 전 국민 주목받은 안가
박정희 정부 시절부터 '밀실 정치'의 공간으로 활용된 서울 궁정동 안가의 전경. 한국일보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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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가의 사전적 의미는 '특수 정보기관 따위가 비밀 유지를 위해 이용하는 일반 집'이다. 해외에서는 정보기관이 특정인이나 물건을 외부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이용하는 보안 공간으로 통용된다. 반면 한국에서 안가는 '밀실 정치'의 대명사로 기억되는 편이다. 역대 대통령들이 안가에서 비밀 회동을 하며 국정을 운영한 사례가 적잖았기 때문이다.
안가 특성상 정확히 언제부터 국내에서 운영됐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박정희 정부 시절인 1960년대 후반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 전신)가 대통령의 사적 공간 필요성을 내세워 건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군사정부 시절 안가는 청와대 인근 궁정동과 삼청동, 청운동 등에 모두 12채가 운영됐던 것으로 전해진다.
비밀스러운 존재인 안가는 1979년 10·26 사건으로 전 국민의 주목을 받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피살된 장소가 서울 궁정동 안가 2층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충격을 던졌다. 피살 당시 연회장에 20대 여성들이 술 시중을 들었던 것으로 드러나, 부정적 이미지가 더해졌다.
'국정농단' 박근혜, 안가에서 기업 총수들 회동
10·26 사건이 일어났던 서울 궁정동 안가를 허물고 그 자리에 조성한 시민 공원 '무궁화동산'. 김주성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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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를 거쳐 집권한 문민정부는 군사정권의 폐습을 타파했다. 1993년 김영삼 전 대통령은 삼청동 안가 한 곳을 제외한 나머지 건물을 모두 없애도록 지시했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안가를 완전히 개방해 시민들이 휴일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실제로 궁정동 안가의 경우 '무궁화동산'이라는 이름의 시민 공원으로 탈바꿈됐다.
유일하게 남은 삼청동 안가는 보수 정부 시기에 주로 활용됐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07년 12월 당선자 시절부터 경호상 이유로 안가를 공관으로 사용했다. 2011년 1월에는 청와대가 아닌 안가에서 당·정·청 지도부와 비공개 만찬 회동을 하며 불편했던 당정 관계 회복을 도모하기도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전 대통령도 안가를 적극 찾았다. 그 역시 안가를 위법한 정치 행위 공간으로 사용했다. '국정농단 사건'에 연루된 박 전 대통령은 2015~2016년 안가에서 대기업 총수들과 독대하며 비선 실세 최순실(개명 뒤 최서원)씨가 주도한 미르·K스포츠재단의 지원을 요청한 것으로 드러났다.
"폐쇄적인 청와대" 지적한 尹, 안가 악용 모순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가 2022년 3월 서울 종로구 한국금융연수원 별관에 마련된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회견장에서 대통령 집무실을 용산 국방부 청사로 이전하는 방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공동취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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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대통령에게도 안가는 불법 통치 수단이었다. 윤 대통령은 지난 3일에 이어 비상계엄이 해제된 4일 저녁에도 안가에서 박성재 법무부 장관과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 이완규 법제처장, 김주현 대통령실 민정수석을 만나 후사를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 대통령의 '안가 정치'는 자신이 내세운 정치 철학과 모순된다. 윤 대통령은 지난 대선 당시 청와대 이전을 공약으로 내걸어 당선됐다. 윤 대통령은 2022년 3월 기자회견에서 대통령 집무실을 용산 국방부 청사로 이전하는 이유에 대해 "청와대 공간의 폐쇄성을 벗어나 늘 국민과 소통하고, 국민의 뜻을 제대로 받들겠다"고 했다.
박 전 대통령에 이어 윤 대통령까지 안가를 악용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안가를 청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미국에서도 대통령 전용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 등에서 내밀한 정치 논의가 이뤄지고 있지만, 한국의 안가보다는 개방적으로 운영된다"면서 "다음 정부에서는 지금과 같은 형태의 안가는 없애는 등 개선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반면 안가를 존치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예컨대 대통령이 해외 사절과 비공식적으로 기밀 사항을 논의할 경우 출입 기록이 남는 대통령실에서 회담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이다. 청와대 출신의 한 정치권 인사는 "안가를 철거하자는 주장은 칼이 위험하다고 칼 자체를 없애자는 격"이라며 "안가의 운영 철학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장재진 기자 blan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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