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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복잡하고 모순적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AI라는 거대한 물결이 세상을 휩쓸고 있지만, 정작 혁신을 이끌어야 할 벤처기업들은 생존의 갈림길에 서 있다. 2024년 벤처업계의 상황을 들여다보면, 이 모순의 실체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마치 봄이 올 것이라는 기대와 한겨울의 추위가 공존하는 것처럼, 희망과 절망이 뒤섞여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R&D 예산의 역설이다. 기술혁신이 국가 경쟁력의 핵심이라는 데는 모두가 동의한다. 하지만 정작 그 혁신을 가능케 하는 R&D 예산은 줄어들었다.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의 총에서 실탄을 빼앗는 것과 같은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국가의 재정 건전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만, 혁신의 동력을 잃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더 큰 재정적 부담이 되지 않을까.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AI를 둘러싼 현상이다. 한편에서는 AI 기술 개발과 인재 확보를 위해 천문학적인 투자가 이뤄지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초기 벤처기업들이 투자 가뭄에 시달리고 있다. 이른바 '투자 보릿고개' 현상이다. 마치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던 시절, 강남의 고층 빌딩 아래에서 판자촌이 공존하던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AI 열풍이 거품이 아닌 진정한 혁신으로 이어지려면, 이러한 양극화 현상부터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
여기에 AI 기본법이라는 새로운 변수가 더해졌다.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대륙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어떤 규칙을 정해야 할까?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을 때처럼, 규칙 없는 개발 경쟁은 자칫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규칙이 너무 엄격하면 어떻게 될까? 마치 항해에 나서는 배에 너무 많은 닻을 달아두는 것처럼, 과도한 규제는 혁신의 속도를 늦출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아주 미묘한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중국발 디지털 쓰나미는 또 다른 고민거리다. 중국의 직구앱들이 국내 이커머스 시장을 침식해 들어오는 동안, 우리는 규제 강화와 플랫폼법이라는 방패를 들었다. 티몬과 위메프의 사태를 계기로 이커머스 업계에 대한 규제는 더욱 촘촘해졌다. 디지털 플랫폼이 시장을 독점하고 불공정한 거래를 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그 규제의 칼날이 너무 예리하면 어떻게 될까? 네이버나 카카오 같은 국내 플랫폼 기업들의 경쟁력이 떨어지고, 오히려 구글이나 메타 같은 해외 기업들에게 시장을 내주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 보호무역과 자유무역 사이의 딜레마가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IPO 심사 강화와 코스닥 시장의 침체는 이러한 우려를 더욱 깊게 한다. 파두 사태 이후 심사 기준은 한층 엄격해졌고, 이는 벤처기업들의 출구 전략을 더욱 좁게 만들었다. 마치 등산로의 난이도는 높아졌는데, 정작 정상에 도달했을 때의 보상은 줄어든 것과 같다. 기업공개는 벤처기업의 성장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이정표다. 이 길이 너무 좁아진다면, 많은 기업들이 중도에 포기하거나 해외 시장으로 눈을 돌리게 될 것이다.
신산업과 기존 산업 간의 갈등 역시 뜨거운 감자다. 혁신은 필연적으로 기존 질서의 파괴를 동반한다. 하지만 그 파괴의 과정에서 누군가는 생존의 위협을 느낀다. 택시기사들이 카풀 서비스에 반대하고, 의사들이 원격진료를 경계하는 것처럼. 이 갈등의 해법을 찾지 못한다면, 우리의 혁신은 언제나 반걸음 늦을 수밖에 없다.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이 공존하는 방법, 그것이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다.
최저임금 1만원 시대의 개막은 또 하나의 도전 과제다. 노동자의 삶의 질 향상이라는 대의에는 공감하지만, 이것이 벤처기업들에게는 생존의 문제가 될 수 있다. 특히 초기 벤처기업들에게 이는 감당하기 힘든 부담이 될 수 있다. 혁신의 씨앗이 싹을 틔우기도 전에 말라버릴 수 있다는 얘기다. 상생의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결국 모두가 패자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희망은 있다. 퇴직연금의 벤처펀드 유입 논의와 CVC 활성화에 대한 기대가 그것이다. 민간자본의 유입은 마르다시피 한 투자의 샘물을 다시 흐르게 할 수 있다. 대기업과 벤처기업 간의 상생 역시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 이는 단순한 자금 공급을 넘어, 경험과 노하우의 공유, 시장 개척의 협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스마트한 규제'다. 마치 좋은 부모가 자녀의 성장을 위해 적절한 규율을 정하되, 그 안에서 충분한 자유를 주는 것처럼. 규제는 있되 혁신을 막지 않고, 보호는 하되 경쟁력을 해치지 않는 그런 규제가 필요하다. 이는 말처럼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이 미묘한 균형점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
2024년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시험대가 될 것이다. AI 기본법과 플랫폼법이라는 두 개의 새로운 닻을 던지면서, 우리의 벤처 항해는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 것인가. 이 항해가 성공적이라면, 우리는 새로운 대륙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패한다면, 우리는 그저 항구를 맴도는 배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지금 매우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다. 한쪽은 혁신을 통한 도약의 길이고, 다른 한쪽은 정체와 쇠퇴의 길이다. R&D 예산 삭감, 투자 양극화, 과도한 규제, 시장 침체 등은 모두 우리를 후자의 길로 이끄는 유혹이다. 반면 AI 기술의 발전, 민간자본의 유입, 대기업과의 협력은 전자의 길로 가는 이정표가 될 수 있다.
혁신의 겨울이 가고 봄이 오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이 미묘한 균형점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 당장의 안정을 위해 혁신의 속도를 늦출 것인가, 아니면 약간의 불안정을 감수하고서라도 혁신의 고삐를 더욱 당길 것인가. 이는 단순히 벤처업계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미래가 걸린 문제다.
봄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우리가 봄을 불러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봄을 맞이할 준비는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해야 한다. 규제와 혁신이라는 두 날개의 균형을 맞추면서, 우리는 새로운 도약을 준비해야 한다. 그것이 2024년 대한민국 벤처생태계가 마주한 가장 큰 과제이자 사명일 것이다.
글 : 조상래(xianglai@platum.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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