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 인터뷰
"12·3 계엄, 정치 아닌 폭력 행위…후진국에서나 일어날 일"
"정치인, 거짓말 하고도 수치심 못느껴…한국에 희망 없어"
"인간은 말의 신뢰를 깨뜨렸을 때 수치심을 느끼게 진화했다. 그런데 지금 정치인들은 거짓말을 하고도 염치가 없어 사과하지 않는다. 최소한의 양심을 복원하지 않는다면 정치를 재건할 방법이 없다."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정치권이 극도의 갈등을 겪고 있다. 그러나 '내가 죽으면 너도 같이 죽자'는 물귀신 작전으로 갈등의 양상은 더 커지는 모양새다.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은 '이재명에게 대권을 내줄 수 없다'며 버티고 있고, 더불어민주당은 '내란에 동조한 정당은 국민 반역자'라며 몰아세우고 있다.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는 지난 17일 진행된 아주경제 인터뷰에서 이런 한국 정치 현실에 더 이상 대화와 타협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다소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극단의 정치 원인은 제도적 문제보다도 민주주의 체제를 운영하는 정치인들의 성숙도에 달려 있는데 이는 인간의 '인격' 영역이라 현재 정치인들을 전면 교체하지 않고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최 명예교수는 "지금은 희망을 말하기보다 현실을 제대로 인지하고 공유하는 것이 우선"이라며 "정치가 무너지고 있다는 말은 곧 우리 시대의 지성과 양심이 무너지고 있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다음은 최 명예교수와 일문일답.
-이번 비상계엄 사태를 보면서 많은 국민이 크게 놀랐다.
"안 놀란 사람이 있겠나. 대한민국은 아직 계엄의 기억이 충분히 사라지지 않은 나라다. 계엄으로 고생했던 분들, 억압받은 분들도 아직 생존해 계신다. 그런 나라에서 다시 계엄이 일어났으니 국민 충격이 더하다. 후진국에나 있을 법한 일이 선진국이라 생각되는 곳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도 전 세계 시선이 좋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20년 동안 5명 중 3명의 대통령이 탄핵과 관련됐고 경제는 계속 우하향하는 국가다. 얼마나 취약한 국가인지를 보여준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다고 생각하나.
"제도적 취약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정치 철학의 부재 때문이다. 문명은 물건·제도·철학 등 세 가지 층으로 구성돼 있다. 물건에만 시선이 가 있으면 후진국이다. 물건을 포함해 제도까지 시선이 가 있으면 중진국이다. 물건과 제도, 철학 단계까지 간 곳은 선진국이다. 그런데 한국은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대통령제, 내각제 등 제도적 문제에만 논의가 국한돼 있다. 사상이나 철학적 논쟁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철학적 단계는 어떤 상태인가.
"철학적 단계에서는 사람의 인격, 양심의 문제가 작용한다. 즉, 제도가 잘 운영되기 위해서는 인격적이고 양심적이고 반성할 줄 아는 인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런 사람들이 갖춰져 있지 않아 민주주의를 '완숙' 시키는 단계로 진입하지 못하고 민주주의 승리만 반복적으로 외치고 있다.
-성숙한 시민이 필요하다는 뜻인가.
"그렇다. 간단히 얘기해서 과거 왕정시대 땐 왕이 혼자 생각한 뒤 지시를 내리면 백성들은 따르기만 했다. 그런데 왕 혼자 나라를 운영해서는 이 사회의 효율성을 키울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자 백성들이 왕을 없애고 전부 각자가 왕 역할을 하게 됐다. 스스로 공동체에 대해 생각하고 책임감을 갖고 움직이는 '시민'이 된 것이다. 그러니 시민이냐, 백성이냐의 차이는 스스로 생각하느냐, 생각하지 않느냐의 차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진영 정치가 강화하면서 생각하는 시민이 줄기 시작했다. 진영 정치에서는 우리 편 이념을 얼마나 더 강하게 주장하느냐만 중요한 일이 된다. 결국 제한적인 생각을 하게 돼 진영에 갇히고 다시 진영 논리를 반복하면서 생각하지 않는 세월을 보내고 있다."
-지금은 오히려 정치권이 갈등을 조장하고 있는 것 같은데.
"철학자의 뜬구름 잡는 소리로 들릴 수 있지만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국가가 무엇인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나는 누구인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다시 생각하고 기본에서 출발하는 일 말고는 다른 해결책이 없다. 이미 대한민국은 지금까지 방식과 사고 능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에 도달했다. 20년 동안 세 번의 대통령 탄핵과, 계엄이 다시 일어난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우리는 이를 인정하고 새로운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
-구체적인 대안이 있나.
"거짓말을 안 하거나, 했으면 바로 사과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정치인의 '말의 신뢰성'을 높여야 한다. 과거에는 힘과 두려움으로 지배하는 세상이었다. 누가 더 주먹을 잘 쓰느냐에 따라 서열이 결정됐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주먹과 폭력만으로는 생산성이 증가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사람들은 그때부터 말로 소통하기로 결정했다. 철학과 정치도 이때 탄생했다. 말 잘하는 사람이 수준 높은 사람이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그들을 가리켜 '레토르'(rhetor, 연설가)라고 했다. '레토릭'(rhetoric)의 어원인 '레토리케'(rhetorike)도 이때 만들어졌다. 말로 청중을 설득하는 기술이라는 뜻이다. 정치가 잘 된 나라는 레토릭이 좋은 나라다. 정치 선진국에서는 정치인들의 말이 교과서에 실리기도 한다. 그런데 대한민국 정치인들의 말은 자녀들에게 차라리 듣지 않게 하는 게 좋을 정도다. 안타깝다. 심지어 여기서 나아가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말이 아닌 폭력을 사용한 것이다."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어린아이도 아는 사실 같은데.
"그렇다. 그런데 지금 정치인들은 수치심을 느끼지 못한다. 인간은 말의 신뢰를 깨뜨렸을 때 수치심을 느끼게 진화했다. 그걸 염치라고 한다. 그런데 거짓말하고도 염치를 모르고 사과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가 '정치가 잘못됐다'고 하는데 그 말은 곧 '말의 질서'가 무너졌다는 뜻이다. 말의 질서가 무너져서 계엄까지 오는 지경으로 정치가 추락한 것이다. 말의 질서를 지키는 또 다른 힘은 양심이다. 다른 한 가지는 지성이다. 말을 설득력 있게 하는 힘이다. 그래서 '정치가 잘못됐다'의 또 다른 말은 지성과 양심이 무너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정치를 바로 세우려면 정치 철학을 세워야 한다. 정치 철학을 지키려면 말에 신뢰가 있어야 한다. 말의 신뢰가 있으려면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 수치심을 알아야 한다. 부끄러움을 알고 수치심을 알려면 최소한의 양심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고는 재건할 방법이 없다."
-부끄러움을 알고 최소한의 양심을 갖게 정치인을 각성시키는 방법이 있나.
"지금껏 거짓말로 이득을 얻고, 그 방식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거짓말을 안 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본다. 결국 지금 정치 세력으로는 이 정도 수준의 정치밖에 할 수 없고, 추락 속도를 멈출 수 없다."
-그렇다면 정치 세력의 교체가 필요한가?
"전면적인 교체만이 이 일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많은 이들이 희망적인 얘기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나 역시 그것이 옳은 일이라 믿고 살아왔다. 그런데 지금 이 단계에서는 희망을 말하기보다 사태를 제대로 인식하고 그 인식을 제대로 공유하는 게 더 중요한 것 같다. 지금 이 구조 그대로 가면서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고 말하는 건 우리 자신을 속이는 일이 된다."
-현재 정치인들이 이 사실을 모르진 않을 것 같다.
"물론 다 알 것이다. 무서운 건 그것을 아는데도 아는 대로 행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당은 당연히 당리당략으로 움직여야 한다. 그런데 당리당략의 수준 자체도 너무 낮다. 당의 이익과 전략이 정말 생각하는 능력에서 나왔는가, 아니면 진영 정치에 갇힌 맹목적 믿음에서 나왔느냐 하는 차이가 있다."
-기본으로 돌아가는 데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 같다.
"그렇다. 정치인들도 이러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기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할 수 없어서다. 기본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우리나라에 지금 이상의 희망은 없다."
아주경제=김지윤 기자 yoon0930@a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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