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오후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평화교육센터에서 4·3 당시 광주형무소에서 희생된 고 양천종씨의 신원확인 보고회가 열려 유족들이 헌화 분향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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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년 만이었다. 울며 떠난 제주땅이었다. 손자와 자식들을 남겨놓고 떠나는 발길은 떼어지지 않았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떠난 양천종(당시 53)씨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22살의 딸 양두영(97)씨는 이제 100살 가까운 백발의 할머니가 됐다. 양 선생이 돌아온 날, 제주공항 활주로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다는 흩뿌리는 비 날씨 속에 하얀 파도를 일으키며 휘몰아쳤다.
17일 오후 2시 제주공항 도착문이 열리고, 제주4·3평화재단과 4·3유족회 관계자들이 안은 하얀 보자기에 싼 유해가 나왔다. 아버지를 애타게 기다리던 휠체어에 탄 딸은 “아버지”하고 몇 마디 중얼거리다 흐느끼는지 하얀 보자기에 얼굴을 묻고 비비고 비볐다.
당시 2살이던 손자 양성홍(78)씨는 제주4·3희생자유족회 행방불명인협의회장이다. 양 회장은 제주4·3사건 직권재심 재판이 있는 날에는 꼭 법정에 나가 유족들의 이야기를 듣고 같이 눈시울을 붉힌다. 양 회장의 아버지 양두량(당시 27)씨도 4·3 당시 육지 형무소로 이송된 뒤 행방불명됐다. 아버지와 아들이 4·3사건 당시 육지 형무소에서 행방불명된 것이다.
양 회장은 기자와 만나 “지난 9월 4·3평화재단으로부터 옛 광주형무소에서 할아버지의 유해가 나온 것 같다는 말을 듣고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고 당시의 상황을 털어놨다. 양 회장은 “대전형무소에서 수감됐다가 행방불명된 아버지의 유해를 찾기 위해서 채혈했는데 할아버지의 유해를 찾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17일 오후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평화교육센터에서 열린 4·3희생자 신원확인 보고회에서 고 양천종씨의 딸 양두영(97)씨가 헌화 분향하고 있다. 허호준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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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회장의 할아버지 양천종씨는 4·3 당시 제주읍 연동마을에 살다가 1948년 겨울 토벌대의 초토화로 집이 불에 타자 가족들을 이끌고 중산간인 천왕사 인근 골머리오름으로 피신했다. 양씨는 피신생활을 하다가 이듬해 3월 ‘귀순하면 살려준다’는 토벌대의 선무공작을 믿고 하산해 제주 주정공장에 수용돼 조사를 받고 1개월 뒤 풀려났다. 그러나 같은 해 7월께 밭에 갔다 귀가하다 토벌대에 끌려갔고, 같은 해 11월 광주형무소로 이송됐다. 양씨는 광주형무소에서 가족들에 안부 편지를 보내기도 했으나 그해 12월24일 옥사했다.
이번에 확인된 유해는 옛 광주형무소 무연분묘터에서 2019년 12월 발굴된 유해 261구 가운데 하나다. 제주도와 제주4·3평화재단은 광주형무소에서 발굴된 유해의 유전자 정보를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 조사위원회로부터 받아 4·3희생자 유가족의 유전자 정보와 대조하는 등 신원 확인 작업을 벌여왔다.
양 회장은 2022년 8월30일 제주지방법법원에서 열린 4·3사건 직권재심 재판에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안 계시고, 사진도 한장 남기지 않았다. 어릴 때 어머니한테 아버지가 어떻게 생기셨느냐고 물어봤다”며 “어머니는 제게 ‘너 거울강(가서) 보라. 너영(와) 똑같이 생겼져’라고 말했다”고 해 방청객들을 숙연하게 했다.
유전자 검식을 통해 신원을 확인한 이숭덕 서울대 법의학교실 교수는 “제주도와 제주4·3평화재단이 많이 도와줘 유전자 검색 기법들이 많이 개발됐고 적용하고 있다. 그런 자료가 완비됐기 때문에 다른 기관의 유해도 그것을 이용해 비교 가능할 수 있게 됐다. 제주의 유해 감식사업이 국가 차원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고 평가했다.
오영훈 지사는 추도사를 통해 “4·3 당시 육지 형무소에서 복역하다 억울하게 희생됐지만 행방을 알 수 없는 수형인은 많다. 제주도정은 정부와 유전자 정보를 긴밀히 공유하며 마지막 한 사람의 희생자까지 신원을 찾을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현재까지 제주도 내에서는 417구의 4·3희생자 유해가 발굴돼 144명의 신원이 확인됐고, 이번 도외 지역 유해 신원 확인으로 신원이 확인된 유해는 모두 145명으로 늘었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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