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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목)

연말 특집 ‘비상계엄’ 봉숭아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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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왼쪽부터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 박선영 신임 진실화해위원장. 연합뉴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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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나이 들수록 ‘어른’이나 ‘어른스러움’이라는 말이 점점 더 불편해진다고 썼다. 이제 불편하지 않다. 마침내 ‘어른’이라는 말에서 완전히 해방됐다. ‘이러면 어른스럽지 못해 보일 텐데’ ‘나이 먹고 이러면 안되겠지’ 나를 머뭇거리게 했던 판단과 행동에서 자유로워졌다. 지난 3일 비상계엄 선포 이후 텔레비전과 신문에 등장하는 늙수그레한 얼굴들을 보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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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서 무한재생되는 “상부에서 시켜서”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을 듣다 보니 오래전 개그콘서트의 마지막을 장식하던 봉숭아학당의 비상계엄 버전을 만들면 이런 꼴이 아닐까 싶다. 나이를 잊고 행동하는 방식도 아롱이다롱이다. 우선 교실 맨 앞자리를 차지할 사람은 당연히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다. 그는 불과 일주일 동안 “비상계엄 선포는 위법·위헌” “윤 대통령 탄핵안 통과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 “윤 대통령 조기 퇴진 불가피” 등등 계속해 말 바꾸기를 하면서 나이와 ‘채신머리’는 함께 가는 게 아니라는 걸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동훈 캐릭터의 모델이라고 할만한 두꺼운 뿔테 안경의 똘똘이 스머프는 맨날 잔머리 굴리고 잘난 척하다가 온 마을의 무시를 당한다. 그래도 똘똘이 스머프는 가끔은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이 녀석도 사실은 좋은 녀석이었어’ 계열의 빌런인데 반해 한 대표는 나이를 물리친 새털 같은 ‘가벼움’으로 인해 ‘이 녀석도 사실은 불쌍한 녀석이었어’ 계열의 막차를 타기조차 쉽지 않을 것 같다.





한 대표의 횡설수설이 끝난 자리에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이 일어나 고별사를 읽는다. “여러분과 함께했던 모든 순간이 행복했다.” 고백하자면 이 엄중한 시국에 뿜었다. 로맨스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연예인 병 캐릭터다. 윤석열 대통령이 영화 ‘서울의 봄’을 보고 ‘필 받아 질렀’다면 그는 송승헌이나 원빈 같은 미남 스타들이 송혜교 같은 여자 주인공과 헤어질 때 나오던 ‘너와 함께 했던 모든 순간이 행복했다’류의 독백을 꼭 한번 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 보통 그런 마음은 10대나 20대까지는 품어도 30대가 되면 호르몬 변화와 함께 사라지게 마련인데 백발 청춘인 그는 기어이 해내고야 말았다.





혼자 눈가 촉촉해지는 낭독이 끝나면 뒷자리의 호령이 떨어진다. “위원장 출근 저지 투쟁 자체가 내란 행위다!” 내란 사태 와중에 내란 책임자의 임명을 받고 출근한 박선영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의 일성이다. 과몰입 패러디 캐릭터다. 이제는 영화에서만 등장하는 줄만 알았던 ‘내란’이라는 단어가 뉴스에 쏟아져 나오니 노래방 리모콘의 에코 효과 버튼처럼 임팩트가 필요하면 아무 데서나 눌러도 되는 줄 안다. 하긴 국가 최고 통치권자가 비상계엄 선포를 ‘혼쭐 내려고 한번 해봤어’ 로 이해하는 수준이니 그와 어울리는 늙은이들의 문해력이 초등 수준이라 한들 놀랄 일도 아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 줄에서 군복 위에 소장 계급장을 단 이가 이 모든 환란에서 벗어난 초연한 모습으로 스마트폰 게임을 하고 있다. 그곳에 앉아있던 군복 입은 수십명의 인생이 박살 나고 감옥에서 마감될 수도 있는 칼끝 같은 질문과 답변이 끝나자 마자 게임을 하는 그를 보며 나는 기말고사 기간에도 게임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사춘기 아들의 마음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됐다.





한강 작가는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연설에서 이렇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인간으로 남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요?”



파괴왕의 마지막(마지막이겠지? 설마) 수류탄 핀이 뽑힌 순간 그의 지근거리에 있던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발악하는 모습을 멀리서 보면 슬프고 가까이서 보면 우습다. 그 춥고 어둡던 밤 중무장을 한 채 시민들 앞에서 머뭇거리거나 편의점에서 라면을 사 먹으며 거리를 배회하던 군인들보다, 응원봉을 들고 국회 앞에서 아이돌 댄스를 추며 탄핵을 외치는 십대·이십대보다 그들이 어른이라고, 아니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시작은 대통령이 쏘아 올린 시대착오적 비상계엄 선포였지만 이 사태와 역사책의 마주 보는 한장이 된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을 곱씹으며 한해를 마무리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인간으로 남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인간으로 남을 수 있을까.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인간으로 남기 위해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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