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8월23일자 조선일보 |
김준일 | 시사평론가
“그의 투철한 국가관과 불굴의 의지, 비리를 보고선 잠시도 참지 못하는 불같은 성품과 책임감, 그러면서도 아랫사람에겐 한없이 자상한 오늘의 ‘지도자적 자질’은 수도생활보다도 엄격하고 규칙적인 육군사관학교 4년 생활에서 갈고 닦아 더욱 살찌운 것인 듯하다.”
1980년 8월23일에 발간된 조선일보 ‘인간 전두환’ 기사 중 일부분이다. 당시 조선일보는 ‘육사의 혼이 키워낸 신념과 의지의 행동’이라며 전두환을 찬양했다. 조선일보뿐이었을까. 5·17 내란으로 신군부 일당이 완전히 권력을 찬탈한 뒤 그해 8월에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되자 모든 언론들은 전두환을 칭송하기 바빴다. 동아일보는 “난국 속 영도력 부각” “오도된 가치관 바로…국가지표 뚜렷이”(8월23일치)라 했고 중앙일보는 “솔직하고 사심없는 성품” “몸에 밴 근검생활, 이권엔 냉정”(8월28일치)이라 보도했다. 서울신문은 “새 시대를 여는 새 지도자, 전두환 장군”이라는 시리즈를, 경향신문은 “새 역사 창조의 선도자 전두환 장군” 시리즈를 내보냈다.
지난 4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민주노총을 비롯한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의 ‘윤석열 대통령의 불법 계엄 규탄’ 집회에서 한 시민이 한겨레에서 발행한 호외를 읽어보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3일 밤, 1980년 비상계엄 전국 확대 뒤 44년 만에 계엄을 선포했지만 국회의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가결되면서 비상계엄은 해제됐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12·3 내란사태로 모든 것이 바뀌어버렸다. 더 이상 친위 쿠데타는 음모론이 아니라 현실이 되었다. 우리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게 과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정말 저렇게 노골적으로 칭송할까 생각도 들지만 국민들은 그동안 언론이 어떻게 권력에 굴종하고 곡학아세를 해왔는지를 목도해왔다.
지난 8월29일 윤석열 대통령이 국정브리핑 및 기자회견을 했다. 채 상병 특검법 거부권 행사 의사를 밝혔고 김건희 여사 명품 가방 무혐의 결론에 대해서는 유감 표명 없이 구체적 답변을 피했다. 상당수 언론이 이날 기자회견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도했다. 하지만 일부 언론은 과한 수식어를 쓰며 찬양에 가까운 보도를 내보냈다. 한국방송(KBS)은 “대통령은 결연한 표정으로 4+1 개혁의 당위성을 강조”했다고 보도했고 티브이조선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강한 의지와 의욕이 넘쳤다”며 “수사 현안에 대해선 한발 더 나아가 자신감을 보였다”고 했다.
만약 윤석열의 친위 쿠데타가 성공했다면? 상상하기 싫지만 가정을 해본다면 ‘인간 윤석열’을 칭송하는 저런 보도가 정말 안 나왔으리란 장담을 어떻게 할까. 언론이 처음부터 비상계엄을 정당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극단적인 수단밖에 없냐고 비판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살펴봐야 한다’ ‘야당의 무한 발목잡기가 문제가 없었는지 되짚어봐야 한다’ ‘계엄은 이미 벌어진 일이고 앞으로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는지가 중요하다’ 등의 기사가 쏟아지지 않았을까.
언론, 특히 방송이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명제는 종종 기계적 균형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정국 당시 한국언론학회는 방송위원회 의뢰를 받아 ‘대통령 탄핵 관련 티브이 방송 내용 분석’ 보고서를 발표했다. 요약하자면 탄핵 반대자 인터뷰가 압도적으로 많았기에 당시 방송 보도가 편파적이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때 노무현 탄핵 반대 여론은 70% 수준으로 비등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이 보고서를 인용해 보수언론은 지상파 방송이 매우 좌편향됐다고 주장했고, 한나라당에서는 “방송 때문에 총선에서 패배했다”고 했다. 물론 보수성향 언론학자들이 주도해 작성한 이 보고서에 대해 한국방송학회와 한국언론정보학회 등의 많은 학자들은 비판과 반박을 내놨다.
당시 보고서를 둘러싼 논쟁은 여러 쟁점을 남겼다. 언론은 특정 사안에 대해 5 대 5로 주장을 동등하게 반영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국민의 여론 비율만큼 반영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잘못된 부분을 보다 적극적으로 지적하는 것이 옳은가. 20년 전 한국언론학회의 조언을 따른다면 언론은 최근의 몇몇 여론조사 결과에 따라 윤석열 탄핵 반대 목소리를 대략 20~25% 반영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기에 고개를 끄덕일 국민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최근 130여명의 원로 언론인들의 모임인 ‘언론비상시국회의’가 후배 언론인들에게 호소를 했다. 요구 사항은 첫번째 객관·중립의 허상에서 벗어나 내란범죄의 본질을 파헤쳐달라, 두번째 진영 논리와 자사 이기주의에 빠지지 말아달라, 세번째 정파의 관점이 아닌 시민의 관점과 헌법 수호 관점에서 취재·보도해달라는 것이다. 모두 동의한다. 언론은 역사의 죄인이 아니라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한겨레는 함께 민주주의를 지키겠습니다 [한겨레후원]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