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2.05 (목)

‘100년 만의 대전환론’과 한국의 미래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한겨레

박노자 |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개인이든 사회든 각각의 주체들은 어떤 ‘큰 그림’을 배경으로 해서 그 삶을 개척해나간다. 세계에 대한 이해의 기본 틀, 그리고 미래에 대한 예측이 없다면 아무 결단도 내릴 수 없게 된다. 예컨대 의대를 가는 이들은 많은 경우 ‘의사라는 직업이 나의 미래를 보장해주는 고소득 직종’이라는 ‘큰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미국 유학을 가려는 이라면 ‘미국 학위’의 권위 내지 영어라는 문화 자본의 가치는 당분간 높을 것으로 미래를 예측한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과 지정학적으로 반대의 진영에 속해 있는 중국이나 북한, 러시아 등의 지도층이 갖고 있는 ‘큰 그림’은 과연 무엇일까?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는 모스크바를 방문한 자리에서 시진핑이 푸틴에게 이야기한 ‘100년 만의 대전환론’이다. 즉, 아편전쟁 이후의 19세기나 20세기를 구가했던 구미권 중심의 국제 질서가 이제 쇠락해간다는 믿음은 시진핑 정치의 주요 ‘배경’에 해당한다. 그의 말을 들은 푸틴 역시 ‘서방의 쇠퇴’를 믿지 않았다면 우크라이나 침공 등 무력을 통한 러시아 제국 복구 프로젝트에 착수하지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푸틴과 1950년대 초반의 북-소 관계를 방불케 하는 ‘밀월’을 즐기는 북한의 노동신문도 푸틴이 선호하는 ‘미국 패권 쇠퇴론’ 등을 연일 거론한다. 김정은도 이 담론을 신뢰하지 않았다면 과연 지금처럼 과감하게 푸틴과 같은 배를 탈 수 있었을까?



그러면 시진핑과 푸틴, 김정은의 공통의 신조인 ‘구미권 쇠퇴론’이란 과연 어느 정도 타당한 것일까? ‘서방 패권 몰락’의 예측들은 과거에 많았지만, 그 어느 것도 ‘합리적’이라 하기는 힘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충격으로 오스발트 슈펭글러(1880~1936)의 ‘서양의 몰락’(1918)이 나와 한때 전세계적으로 화제에 올랐지만, 이 책은 결국 객관적 현실을 올바르게 판단했다기보다는 정통적 보수주의자였던 저자의 미국발 ‘기술 문명’에 대한 반감 등을 주로 반영한 것이다. 태평양전쟁 시절에는 일본의 국가주의적 ‘교토학파’나 그 영향을 크게 받은 조선의 박영희(朴英熙, 1901~1950) 같은 전향한 지식인들이 ‘서양 자유주의의 파멸’을 소리 높여 외쳤지만, 결국 일본이야말로 파멸을 맞아 급기야 자유주의적 제국인 미국의 후국으로 재편되고 말았다. 그러면 과연 지금 베이징이나 평양, 내지 모스크바에서 믿는 ‘구미권 쇠퇴론’이라는 것도 이와 같은 종류의 소망적 사고에 불과한 아전인수 격의 허구적 이야기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일단 경제적 측면부터 보자. 국내 사회주의자나 자유주의자들의 대규모 전향이 시작되었던 1938년 당시, 1990년의 달러 가치로 계산된 미국의 국내총생산(약 8천억달러)은 독일과 일본, 이탈리아 등 파시즘 국가의 국내총생산을 합친 것보다 더 컸다. 즉, 물자전에서 미국은 그들을 상대해 단독으로 싸워도 승산이 있을 정도였다. 과거의 운동권이 대거 전향했던 동구권 몰락의 해, 즉 1991년에도 사정은 여전히 기본적으로 엇비슷했다. 명목 세계 총생산의 67% 정도는 구미권과 일본이 차지했다. 몰락한 동구권이 세계 총생산에서 차지한 비중은 불과 9% 정도였고, 중국의 비중은 3% 안팎이었다.



한데 30여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세계 경제의 판도가 전혀 달라졌다. 명목 가치로 따져도 세계 총생산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16.9%)은 유럽연합이 차지하는 비중(17.3%)과 거의 비슷하다. 만약 구매력 대비로 따지면 구미권 비중의 저하는 상대적으로 더 현저해 보인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던 2003년에, 미국이 주도했던 주요 7개국(G7) 국가들의 총생산은 여전히 세계 총생산의 43%나 차지했지만, 지금 이 비율은 30%에 불과하다. 구미권은 지금도 세계적 자본 축적의 중심이지만, 구미권 이외의 자본 축적의 허브가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와 달리 이제 여러 허브 중의 하나일 뿐이다. 다원화된 세계에서는, 한때에 절대적이었던 구미권의 위치는 이젠 상대화되고 말았다.



정치적으로도 구미권의 상대화가 계속 진행된다. 동구권이 망했던 1991년 당시, 북한의 붕괴와 중국의 민주화, 즉 ‘당’국가 체제의 종언은 궁극적으로 시간의 문제라고 대부분의 서방 쪽 분석가들은 믿었다. 한데 그 당시에 ‘역사의 종언’, 즉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의 불가역적 완승을 이야기했던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최근 인터뷰의 제목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바로 “민주주의적 모델의 위기?”라는 제목이었다. 중국의 당국가는 민주화되긴커녕 경제적 경쟁에서 미국을 수세로 몰아넣었다. ‘붕괴’되리라 믿었던 북한의 포탄·미사일은,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남한산 무기와 일종의 대리전을 벌인다. 그리고 서방에서는 트럼프처럼 고립주의를 내세우며 자유민주주의 이상으로 ‘강력한 국가’를 외치는 정객들이 가면 갈수록 득세한다. 기후위기를 포함하여 복합 다중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는 자본주의 세계 체제에서 지금 요청되는 것은 경제와 사회 모든 방면에서 강력한 개입을 할 수 있는, 고도로 발전된 행정 국가다. 이 상황에서 헝가리 같은 일부 유럽 사회에서마저도 중국의 당국가가 ‘벤치마킹’ 대상이 된다는 것은 과연 놀라운 일일까?



약 20년 뒤가 되면 미국의 외채는 국내총생산의 200% 정도의,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달하겠지만, 미국은 내일모레 파산하지는 않을 것이다. 미 달러의 세계 기축 통화로서의 위치나 미국 해외 군사 기지들의 네트워크 등도, 적어도 당분간은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 하더라도 장기적 경향은 틀림없다. 시진핑이나 푸틴은 ‘서방의 쇠퇴’를 중국 내지 러시아 제국주의의 ‘굴기’(堀起)의 기회로 이용하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들이 지니고 있는 서세점퇴(西勢漸退), 즉 서방 세력의 점차적 쇠퇴의 ‘큰 그림’은 적어도 어느 정도 객관적 현실을 반영하기도 한다. 이 현실은 한국의 외교 전략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상식 내지 보편적 인식론에 있어서의 대전환을 요구한다. 무역국가로서의 한국에 필요한 개방적 세계 질서를 미국이 유지했던 시대도, 구미권이 ‘선진국’이었던 시대도 이미 지나갔다. 이제 스스로의 행위자성을 발휘해 바람직한 국제 질서나 기후 참극의 시대에 맞는 생산과 소비의 모델 등을 만들어나가야 할 것이다.



▶▶한겨레는 함께 민주주의를 지키겠습니다 [한겨레후원]

▶▶실시간 뉴스, ‘한겨레 텔레그램 뉴스봇’과 함께!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