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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5 (목)

대한제국, ‘중립화’와 ‘일본 예속’의 갈림길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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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신바시역에 도착한 조병식이 아오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29일이었다. 여기서 놀라운 ‘반전’이 발생한다. 조병식이 꺼내 든 것은 동맹안이 아닌 ‘열강의 공동보장에 의한 한국의 중립화안’이었다. 조병식의 소식을 전해 들은 서울의 기쿠치는 “열린 입이 닫히지 않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고종의 고질병인 ‘뒤통수 외교’에 당한 셈이었다.

한겨레

구한말 조선의 수구파 대신이었던 조병식(1823~1907)만큼 평가하기 어려운 사람은 없다. 그는 함경도 관찰사로 재직하던 1889년 흉년이 들었다는 이유로 곡물 수출을 금지하는 ‘방곡령’을 실시해 일본과 큰 외교 분쟁을 일으켰던 ‘강골’이었고, 당대에 악명이 자자한 탐관오리였다. 고종은 1900년 8월 ‘열강의 공동보장에 의한 한국의 중립화안’ 교섭을 위해 조병식을 도쿄로 보낸다. 그는 한·일 동맹안을 제출하라는 고노에 아쓰마로 동아동문회장의 협박에 가까운 설득에도 굴하지 않았다. 그는 완고한 수구파였지만, 유약한 매국노는 아니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의화단 사건을 계기로 만주를 점령한 러시아는 일본의 기대와 달리 한반도를 상대에게 넘겨 ‘세력균형’을 맞출 생각이 전혀 없었다. 블라디미르 람스도로프(1845~1907) 외무대신 직무대리는 1900년 7월14일 주일 공사로 갓 부임한 알렉산드르 이즈볼스키(1856~1919)에게 전문을 보내 일본이 의화단 사건 진압을 위해 출병한 대가를 한반도에서 얻으려 한다는 소문이 있다며 이를 허용할 수 없다고 알렸다. 그럴수록 러시아를 향한 일본의 감정은 악화될 뿐이었다. 이 갈등에 잘못 휘말렸다간, 나라가 그대로 주저앉을 수 있었다.

심각한 위기 앞에 선 고종 앞에 두개의 길이 열려 있었다. 첫째는 러시아에 맞선 한·일 연대의 길이었다. 본격적인 움직임이 시작된 것은 의화단 사건에 대한 자세한 소식이 전해지기 시작하던 6월 말께였다. 일본어에 능통한 궁내부 시종 현영운(1868~?)이 이 무렵 북청사변(의화단 사건)과 관련해 “이토 히로부미 후작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며 고종의 ‘밀지’를 들고 일본으로 향했다. 하야시 곤스케 주한 일본공사는 이 사실을 보고하는 6월28일치 전문에 “서간(밀지)의 내용에 관해 본사는 전혀 알 수 없었음을 양해해 달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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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에 아쓰마로(1863~1904)는 고셋케(五摂家·교토의 천황을 섬긴 다섯 가문) 출신으로 1896년 귀족원 의장이 됐다. 1898년 11월엔 청·일의 동맹을 주장하는 동아동문회를 설립했다. 1900년엔 한·일 공수동맹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1900년 8월29일과 10월9일 일기에 ‘열강의 공동보장에 의한 한국의 중립화안’을 주장하는 조병식 주일 한국 공사와의 설전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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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의 기념비적 저서 ‘러일전쟁-기원과 개전’에 따르면, 현영운은 일본에서 서양의 침략에 맞서 한·청·일이 힘을 모아야 한다는 ‘아시아주의’를 내걸고 있던 동아동문회(1898년 설립)의 간부 구니모토 시게아키(1862~1909)와 만났다. 이 모임의 회장인 고노에 아쓰마로(1863~1904) 귀족원 의장 등은 현영운에게 한·일이 공수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점을 강력히 설득해 외무성 내 최고 ‘조선 전문가’이자 을미사변(1895)을 주도한 원흉 가운데 하나인 스기무라 후카시 통상국장을 찾아가게 했다. 말이 좋아 동맹이지, 한-일 간의 현격한 국력 차이를 생각할 때 외교 자율성이 상당 부분 제약될 수밖에 없는 ‘예속의 길’이었다. 아오키 슈조 일본 외무대신이 8월7일 하야시에게 전한 이 ‘기이한 만남’에 대한 기록은 ‘주한일본공사관기록’ 14권에 남아 있다. 먼저, 현영운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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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밀명을 받고 일본에 건너간 현영운(1868~?)이 스기무라 후카시(1848~1906) 일본 외무성의 조선 전문가인 스기무라 통상국장과 나눈 대화록은 ‘주한일본공사관기록’ 14권에 남아 있다. 현영운은 “소생이 이번에 명을 받고 건너온 것은 표면으로는 궁내성의 제도 조사라 칭하지만, 그 실은 북청사변(의화단 사건) 이래 우리 금상(今上) 폐하는 깊이 한국의 장래를 염려하셔서 이때 일본국의 형세를 시찰하고 또 그 의향을 확인해(慥メ) 되도록 한·일 양국의 진실한 친목을 도모하여 한국의 안전을 빌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현영운은 한·일이 동맹을 맺어 러시아의 침략에 맞서야 한다는 동아동문회 간부들의 설득에 넘어가 고종을 설득하게 된다. 고종은 그의 의견에 따르지 않았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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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청사변 이래 폐하는 깊이 한국의 장래를 염려하고 있다. 양국의 화친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방법이든지 우리나라의 존립과 이름을 훼손하지 않는 한 이에 동의해야 할 것이다.”

“귀국 정부는 우리 양국 간에 이에 관한 비밀조약이라도 체결할 계획인가.”

“물론이다. 국방동맹을 체결하여 사실상 외부에 대해 양국 일체의 태도를 취할 것이다.”

“정말 바람직한 일이지만, 귀국을 보건대 이 일은 도저히 행해질 가망이 없다.”

“이를 구체적으로 상주해 반드시 채납(採納·의견을 받아들임) 하시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이 엄청난 계획을 마음에 품은 현영운이 귀국한 것은 8월17일이었다. 이후 하야시를 찾아가 자신이 “단독으로 세웠던 계획”(한·일 동맹)을 고종에게 보고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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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현에서 태어난 기쿠치 겐조(1870~1953)는 1893년부터 1945년 일제가 패망하여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50년 이상을 한국에서 활동했다. 을미사변에 직접 가담한 혐의로 조선에서 추방됐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석방됐다. 이후 1898년 조선에서 발행되는 일본어 신문인 ‘한성신보’의 주필로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그는 일본의 조선 침략을 민간에서 적극 지원한 이른바 ‘대륙 낭인’이었다. 기쿠치는 조선사에 대한 저술을 많이 남겼는데 “일본의 조선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역사 침략”(하지연, ‘기쿠치 겐조, 한국사를 유린하다’)이라는 비판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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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동맹론은 이 무렵 조선에서 발행되던 일본어 신문인 ‘한성신보’(1895년 창간)의 주필 기쿠치 겐조(1870~1953)의 지론이기도 했다. 그가 1916년 남긴 ‘조선왕의 국외중립과 국방동맹’이란 글을 보면, 대한제국의 외교수장인 박제순 외부대신을 설득해 가는 과정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기쿠치는 “일·한이 국방동맹을 체결해야 (러시아의 침략에서) 압록강 지계(地界)를 지킬 수 있고, 또 동맹 목적을 달성하면, 다른날(異日·후일)엔 요하 이동(랴오둥 지역)을 회복하는 것도 어렵지 않게 된다”고 말했다. 스스로를 “약소국의 외부대신”이라 부르던 박제순은, 이 얘기를 듣고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 자리를 떠났다. 며칠이 지나 박제순뿐 아니라 이지용 궁내부대신, 김영준 군부대신 겸 내부대신 등이 대한제국의 고관들이 기쿠치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설득이 통한 것이었다.

기쿠치는 “가장 존중하는 선배”인 고노에에게 이런 사실을 전하며 동맹 체결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찾기 시작했다. 도쿄의 고노에가 아오키와 상의한 결과, 동맹을 실현하려면 “한정(韓廷·한국 조정)에서 제국정부(일본)에 이를 제안하는 게 첫째 순서”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래야 러시아의 반발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를 위한 대한제국의 교섭 대표로 지목된 이는 1년 전 독립협회를 때려잡으며 ‘악명’을 얻은 수구파 원로 대신인 조병식(1923~1907)이었다. 하야시가 “당국 원로 중에 완고하고 성질이 강퍅하다고 소문”난 “순수한 한국식 노신사”라고 평한 조병식은 사흘 뒤인 18일 인천에서 도쿄를 향해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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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키 슈조(1844~1914)는 대러 강경론자였던 야마가타 아리토모 1·2차 내각에서 모두 외무대신을 지냈다.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는 저서 ‘러일전쟁-기원과 개전’에서 아오키에 대해 “노골적인 침략주의자”라는 평가를 남겼다.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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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오후 8시 도쿄 신바시역에 도착한 조병식이 아오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29일이었다. 여기서 놀라운 ‘반전’이 발생한다. 조병식이 꺼내 든 것은 동맹안이 아닌 ‘열강의 공동보장에 의한 한국의 중립화안’이었다. 고노에로부터 진행 상황을 듣고 있던 아오키는 크게 놀랐을 것이다.

조병식은 1889년 조선 내에 흉년이 들었다는 이유로 일본에 콩 수출을 금지한 ‘방곡령 사건’을 일으켰던 강골이었다. 일본을 견제하던 러시아·프랑스·미국 등과 접촉하며 ‘중립화’에 대한 지지를 요청해 간다. 이 움직임이 러시아의 관심을 잡아끌었다. 도쿄의 이스볼스키는 9월14일 본국에 보낸 전문에서 “한국 정부는 일본의 엄청난 위협을 받고 있어 러·일이 충돌했을 때 열강의 공동보장 아래 한국을 중립화하는 게 가능한지 문의하는 것을 (조병식) 공사에게 위임했다”면서 자신이 그와 만나 “일본의 회유에 굴하지 말라고 설득했다”고 보고했다.

조병식의 소식을 전해 들은 서울의 기쿠치는 “열린 입이 닫히지 않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고종의 고질병인 ‘뒤통수 외교’에 당한 셈이었다. 상황을 만회하기로 한 기쿠치는 박제순과 의논해 조병식에게 고종이 민감하게 생각하는 ‘망명자 문제’(역모 등을 일으킨 뒤 일본으로 도망간 이들)를 해결하는 것을 전제로 일본과 동맹을 맺으라는 훈령을 내려보내기로 한다. 하야시는 17일 아오키에게 보낸 전문에서 고종이 이 안에 “동의하기에 이르렀다”고 밝혔지만, 정말 그랬는지 심히 의심스럽다. 고종이 원한 것은 중립화였다.

이 무렵 일본 정계는 내각 교체를 앞두고 요동치고 있었다. 나가사키에 도착한 기쿠치는 도쿄로 이동하던 중 시즈오카역에서 구한 ‘마이바라신문’ 호외를 통해 야마가타 아리토모 2차 내각이 총사직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뒤를 잇게 된 것은 ‘대러 협조’를 지향하는 이토 히로부미 4차 내각(10월19일 발족)이었다. 이토와 가까운 ‘메이지 원훈’인 이노우에 가오루는 심지어 열강에 의한 공동 보호론을 찬성하는 인물이었다. 대러 강경파인 야마가타 내각이 유지되는 동안 조병식을 구워삶아 동맹안을 내놓게 해야 했다.

도쿄의 대한제국 공사관으로 찾아온 기쿠치로부터 훈령을 건네받은 조병식은 유감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면서 “후임 내각이 정해질 때까지 기다려 천천히 제출하려 한다”면서 “과연 이토와 이노우에가 우리 제의에 찬동할지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기쿠치는 “칙명을 받지 않겠다면, 이를 각하에게 넘기지 않고 바로 돌아가 전하겠다”고 협박했다. 조병식은 “내일이라도 아오키 외상과 회견해 제의하겠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도 조병식은 당연히(!) 움직이지 않았다. 애가 탄 고노에는 10월9일 그를 도쿄의 고급 요정인 고요칸(紅葉館)으로 불러냈다. 조병식이 통역 하스모토 야스마루를 대동한 채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오후 6시께였다. 이 대화는 1968년 활자본으로 편집돼 출판된 ‘고노에 아쓰마로 일기’ 3권 348~349쪽에 수록돼 있다. 고노에는 다짜고짜 조병식을 몰아 세웠다.

“한국 왕의 밀칙 건을 왜 오늘까지 우리 정부에 제의하지 않는가.”

“이처럼 큰 사건은 일단 귀국해 숙의하지 않으면 말을 꺼내기 어렵다.”

“조칙을 받고도 대체적인 제의도 하지 않은 채 귀국하면 일본이라면 ‘명령 위반’(違勅)으로 죄를 면하기 어렵다. 한국의 원훈(元勳)으로 사명을 다하지 않고 돌아가게 되면, 귀국 후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귀국 후에 숙의해야 한다.”

“한국은 현재 극히 위험하다. 내지의 개량이 필요하다. 내지의 개량은 국가의 방비를 마친 뒤에 논해야 한다. 귀국은 일본처럼 고도(孤嶋·떨어진 섬나라)가 아니다. 국방의 엄혹함으로 보자면, 누란(累卵)의 위기와 같다. 국방에는 다수의 병력과 무기, 연안 방비에는 포대와 군함이 필요하다.”

조병식은 “귀국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다”고 인정했지만, 뜻을 꺾진 않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고노에는 “중요한 공무를 태만히 하는 것은 우리나라 같으면 국적(國賊)이라 할 것”이라고 쏘아붙였다. 조병식은 완고한 인물이었지만, 유약한 매국노는 아니었다. 대한제국이 중립화에 대한 확고한 입장을 보이자, 이를 지켜보던 러시아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뜻밖에도 편을 들고 나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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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윤형 | 논설위원. 대학에서 정치외교를 공부했다. 도쿄 특파원, 통일외교팀장, 국제부장으로 일하며 일제 시대사, 한-일 과거사,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질서의 변화 등을 둘러싼 기사들을 썼다. 지은 책으로는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 ‘아베는 누구인가’ ‘26일 동안의 광복’ ‘신냉전 한일전’ 등이 있고, ‘공생을 향하여’ ‘북일교섭 30년’ 등을 번역했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힘은 스스로를 냉정히 돌아볼 줄 아는 ‘자기 객관화 능력’이라고 믿는다.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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