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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5 (목)

이슈 미술의 세계

40년전 한국 미술판 뒤흔들고 흩어진 불온한 ‘힘’을 추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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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지난 11월24일 미술동인 두렁 창립 40주년 전 ‘두렁, 지금’이 열린 관훈갤러리 3층에서 펼쳐진 자료집 ‘두렁, 앞뒤’의 출판 기념회 광경. 정정엽, 라원식, 이기연, 성효숙씨 등 두렁 동인 작가들과 자료집을 만든 김종길 기획자가 축하케이크의 촛불을 불어서 끄고 있다. 케이크 앞에 출간된 자료집 ‘두렁, 앞뒤’가 보인다.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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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라 가자 몹쓸 세상/설운 거리여 두어라 가자/언 땅에 움터 모질게 돋아/봄은 아직도 아련하게 멀은데…’

일요일이던 지난달 24일 저녁나절 서울 인사동 문화거리 골목길 어귀의 관훈갤러리 3층에서는 김민기(1951~2024)의 1980년대 노래극 ‘공장의 불빛’ 말미에 나오는 언니의 노래 ‘두어라 가자’가 울려 퍼졌다. 양평문화재단 이사장을 지낸 미술평론가 라원식(66)씨가 비장한 목소리로 선창하자 그 앞에 모여든 생활한복 질경이 우리옷 대표 이기연(68)씨와 저명한 그림책 작가 이억배(64)씨 등 비슷한 연배의 남녀 작가 10여명도 눈을 빛내며 나지막하게 곡조를 따라 불렀다. 이들은 한국현대미술사에 고유명사로 아로새겨진, 지금도 시위 현장에 나오는 걸개그림과 사회 비판적 시사만화와 대중용 목판화, 그리고 생활한복을 창안한 주역들이다. 30~40년 전 군사독재정권 시절 제도권 미술계와는 틀거지가 다른 민족적 형식과 행동주의 미술을 부르짖으며 한국 리얼리즘 미술판에 새 지평을 열었던 현실참여 미술 동인 ‘두렁’의 예술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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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24일 미술동인 두렁 창립 40주년 기념전 ‘두렁, 지금’이 열린 관훈갤러리 3층에서 펼쳐진 자료집 출판 기념회 광경. 축하 케이크의 불을 끈 뒤 정정엽, 라원식, 이기연, 성효숙씨 등 두렁 동인 작가들과 자료집을 만든 김종길 기획자가 박수를 치고 있다.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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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렁 작가들이 모인 건 이들의 40여년 활동사를 담은 808쪽 분량의 자료집 ‘두렁, 앞뒤’(수류산방)의 출간을 축하하기 위해서였다. 김종길, 양정애, 조민우, 이정주, 심세중씨 등 후대 연구자와 출판기획자들이 모임을 결성해 10년간의 구술조사와 취재를 거듭한 끝에 기록, 편집한 이 자료집은 ‘한국 민중 미술사의 재구성’이란 부제를 달았다. 공단과 빈민촌, 농촌 곳곳에서 노동자 농민과 연대해 현장 미술작업과 공방 활동을 벌이면서 탈춤·민화·불화·풍속화 등의 전통 시각예술을 계승한 민족적 민중적 형식을 쉼 없이 탐색했던 ‘두렁’ 작가 16명(라원식·김노마·김명심·김봉준·김주형·김진수·박홍규·성효숙·양은희·이기연·이억배·이은홍·이정임·이춘호·장진영·정정엽)의 활동상에 대한 구술증언과 수백여점의 주요 작품, 아카이브 등이 집대성되었다. 이제 70줄 바라보는 나이가 된 작가들은 느꺼운 감회를 쏟아냈다. 라원식 비평가는 “오늘은 두렁이 한국 미술의 역사에 자리 잡게 되는 한 매듭의 자리인 것 같다”면서 “저희가 지나온 과정들이 한국 미술사에 어떤 자양분으로 썩어 거름이 될 지는 알 수 없지만, 후배들의 노력 덕분에 해왔던 작업을 묶어 한국 미술계가 공유할 자산으로 돌릴 수 있다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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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집 ‘두렁, 앞뒤’의 표지. 미술사연구자 김종길, 양정애씨가 주도한 미술동인 두렁 컬로퀴엄 편찬모임에서 엮고 수류산방에서 펴냈다.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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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렁은 논밭을 둘러쌓은 둔덕으로 일하고 놀고 쉬는 삶의 현장을 뜻하는 순우리말. 걸개그림 대가로 꼽히는 김봉준 작가와 훗날 생활한복 장르를 만든 이기연 작가 등 네 명이 1982년 두렁 이름으로 준비 모임을 결성했다. 홍익대와 이화여대, 경희대 등의 대학 탈춤반과 민화동아리들을 중심으로 세를 규합한 ‘두렁’은 1983년 서울 애오개 소극장에서 창립 예행 전, 1984년 서울 인사동 경인미술관에서 창립전을 치른 뒤 노동자, 농민 등의 현장으로 흩어져 들어간 ‘산개(散開)’ 방식으로 작업을 확장했다. 당시 제도권 미술을 상품화된 ‘죽은 그림’이라고 비판하면서, 이야기를 전하는 그림의 본래 구실을 되살리고 민중의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산 미술’을 강조했다. 걸개그림, 판화, 벽화 등 민족적 양식으로 공동체적 삶을 표현하려는 시도들이 현장에서 이뤄졌다. 장르 영역에 얽매이지 않은 작업은 2000년대 이후 한국미술의 탈장르 탈매체 흐름의 선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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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책그림 작가로 이름 날리고 있는 이억배 작가가 1988년 천위에 아크릴 물감으로 그린 걸개그림 ‘떨쳐 일어나’. 두렁 40주년 기념전에서 보기 드물게 나온 실물 걸개그림 작품이다.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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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기념회가 열린 전시장 풍경도 예사롭지 않았다. 자료집 발간을 맞아 강성은 기획자가 자료집에 수록된 작품들과 아카이브들을 중심으로 꾸려 준비한 기념전 ‘두렁, 지금’(11월9~29일)이 펼쳐진 현장이었다. 1984년 창립전 뒤 40년만에 차린 두렁의 두번째 전시회이기도 했다. 사방 벽에는 40여 년 전부터 최근까지 작가들이 노동자, 농민, 빈민들의 현장에서 작업했던 숱한 그림과 출판물, 사진들을 빼곡하게 붙였고 작가들이 앉은 자리 옆에도 출판물과 달력, 판화, 만화를 늘어놓은 진열대를 배치해 놓았다. 두렁 동인의 결성과 창립, 이후 동인들의 운동이 각기 현장으로 흩어지고 다른 방식으로 전화되기까지의 양상을 담은 ‘두렁, 지금’ 전은 거칠고 강렬한 판화와 그림, 걸개그림, 풍자만화 연작 등으로 채워져 군사독재 아래의 시국을 비판하고 선전선동에 주력했던 당대 현장 미술의 열기가 와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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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렁’의 주축으로 활동했던 이기연 작가의 1985년 작 ‘목동아줌마’.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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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창립예행전과 1984년 창립전 당시 탈춤연희와 김봉준 작가 등이 작업한 걸개그림 도판들은 사진으로만 실렸지만, 80년대 중반 이후 작업은 실물들이 상당수 발굴돼 자료집과 전시에 두루 선보였다. 경찰이 전시장에 들어가 그림을 끌어내리고 작가를 연행한 초유의 사건으로 ‘민중미술’이란 용어가 탄생한 계기가 된 1985년 ‘한국미술 20대의 힘’전 관련 아카이브는 자료집과 전시의 핵심 콘텐츠로 꼽혔다. 당시 전시 포스터와, 경찰이 압수했던 대우어패럴 노동자 투쟁 현장을 담은 두렁 동인들의 종이 패널화, 이기연·김봉준 등 주요 동인들의 대표적인 판화작품들이 시기별로 망라되었다. 1980년작 판화 ‘지게꾼’이나 1985년작 판화 ‘목동아줌마’ 등을 통해 당대 서민의 전형적인 풍모를 담은 이기연 작가의 작품들은 두렁 초창기 시절의 수작들이다. ‘세상에서 제일 억센 수탉’ 등 그림책 삽화로 유명한 이억배 작가의 1988년작 걸개그림 ‘떨쳐 일어나’도 눈길을 끄는 대작으로 기층민중과의 연대의식을 개성적인 얼굴과 몸짓 묘사로 드러낸 회화적 역량이 도저하게 느껴진다. 90년대 이후 작업판 위에 쓰러져 자는 여공의 모습을 핍진하게 그린 성효숙 작가의 ‘꿀잠’도 깊은 인상을 남기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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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형사들이 전시장에 들이닥쳐 작품을 끌어내리고 무단압수해갔던 1985년 ‘한국미술 20대의 힘’ 전 당시 전시포스터도 40주년 전에 나왔다. 당시 ‘…힘’ 전 출품작가들 가운데 상당수가 ‘두렁’의 작가들이었다.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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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렁은 1979년 결성한 선배 동인 ‘현실과 발언’(이하 현발)의 현실비판 리얼리즘 계보를 이어나간 80년대 민중미술운동 주축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에는 엘리트 작가 중심의 ‘현발’이 민중미술의 대명사처럼 과포장되면서 잊혀졌다. 자의식과 현시욕이 강했던 현발 동인들보다 소그룹 현장 활동을 했던 두렁 동인들은 공동체 집단의 정체성을 세우는 데 주력해 작가들의 개별적인 활동들은 기록되지 않고 묻히는 난점이 있었다. 이번에 나온 자료집 ‘두렁, 앞뒤’는 그런 공백을 메우면서 민중미술사 연구의 새 지반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책을 만든 주역인 김종길 기획자는 전시장에서 고무된 표정으로 말했다. “10년 전 라원식 선배의 권유로 작업을 시작한 뒤 두렁 작가들 증언을 기록하고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작품과 아카이브를 발굴하는 힘겨운 작업이 되풀이됐지만, 많은 이들의 울력으로 결국 자료집을 냈습니다. 80년대 두렁과 함께 현장 활동을 했던 서울미술공동체도 최근 아카이브 전시를 했고, 다른 민중미술 단체들의 자료들도 계속 나오고 있어요. 이제야 민중미술 역사가 균형 잡힌 시각 아래 연구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된 듯해요. 후학들에게 선물 내놓는 기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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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 나왔던 대형 집단창작그림인 ‘그린힐 노동참사 여성노동자 22인 영정도’. 140X124cm의 종이에 단청안료로 그린 대작이다. 1988년 ‘두렁’ 동인작가였던 이억배씨가 우리그림이란 모임을 만들어 이억배, 정유정, 권윤덕, 홍대봉 작가와 같이 그렸다.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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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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