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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욱 | 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장
대학교수들이 윤석열 정권 비판 성명을 잇달아 발표하고 있다. 11월6일에는 인천대 김철홍 교수 등 44명이 “노벨 문학상 수상도 제대로 축하해주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는 안타깝다 못해 서글프다. … 상생과 균형의 정치는 실종되고 마치 전쟁 같은 정쟁만이 판치는 품격 없는 사회가 되었다”고 하면서 “윤석열 정권은 … 국정농단을 넘어 … 수준 또한 치졸하고 저급하기 이를 데 없다”고 했다. 나아가 “그런데 왜 부끄러움과 자괴감은 항상 국민의 몫인가”라고 개탄하면서 윤 대통령의 사퇴를 요구했다.
교수들은 윤 대통령이 ‘무지와 무능 그리고 불의와 불법, 불통의 상징처럼 돼버렸다’고 했다. “편 가르기와 파행적 인사,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혐오의 정치로 인해 연대의식은 사라지고 공동체는 무너지고 있다. 이것이 불과 2년 반 동안 우리가 겪은 윤석열 정부 치하 한국 사회의 처참한 모습”이라고 했다(연세대 교수 성명). 윤 대통령이 지도자로서 필요한 최소한의 자질과 능력도 갖추지 못한 주제에 대통령 부인과 정치 브로커의 국정 농단 의혹까지 점입가경으로 펼쳐진 상태에서 ‘임기를 고수하는 것은 국가 위기를 더욱 심화시키고 결국 나라를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이끌 것이기 때문에 중도 사퇴해야 한다’고 했다(강원도 교수·연구자 성명).
지난 역사에서도 1960년 4월25일 250여명 교수는 이승만 대통령의 사퇴를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했다. 앞서 그들은 서울대 교수회관에 모여 “이번 4·19 의거는 이 나라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계기”라고 천명하고 그 위기를 철저히 규정(糾正: 잘못을 밝혀 바로잡음)하지 않고는 “민족의 불행한 운명을 만회할 길이 없다”면서 14개 조항의 시국선언을 채택했다. 선언문에서 민족적 대참극, 대치욕을 초래케 한 대통령을 비롯해 국회의원, 대법관 등은 그 책임을 지고 물러나라고 촉구했고 또 “총탄과 폭력으로 대량의 유혈 참극을 빚어낸 경찰은 민주와 자유를 위한 국립경찰이 아니라 불법과 폭력으로 정권을 유지하려는 정치집단의 사병”이라고 규탄했다.
시국선언에 이어 교수들은 펼침막을 들고 거리로 나섰고 그 행렬을 수만명 시민이 뒤따르면서 밤새 시위를 벌였다. 마침내 이승만은 다음날 대통령직을 사임해야 했다. 이 시위의 의의는 교수들이 들었던 펼침막의 ‘각대학교수단’(各大學敎授團)이라는 글자를 ‘학생 피에 보답하라’는 구호의 글자보다 훨씬 큰 글씨로 돋보이게 했던 데에서 살펴볼 수 있다. 교수들은 불과 엿새 전 경찰 발포로 19명 초중등학생을 비롯해 200여명이 희생됐고 6300명이 부상당한 그 거리로 나가 다시 시민들을 불러내 끝내 독재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 문을 열어 역사를 바꾸었다.
전두환 군부 치하에서 1985년 2·12 총선 이후 군사정부 헌법을 민주헌법으로 바꾸기 위한 개헌운동이 전개됐다. 이 개헌운동에 1986년 고려대 교수들을 시작으로 전국 29개 대학에서 783명이 시국선언 방식으로 가세했다. 1987년에도 교수들은 전두환의 이른바 ‘4·13 호헌조치’를 반대하는 성명서를 잇달아 발표했다. 6월 항쟁 승리로 직선제 개헌을 성취할 때까지 2년에 걸친 싸움이었다. 이 시국선언에 전국 48개 대학, 29개 사회단체, 초중고 교사 등이 동참했다. 교수들은 정부가 개헌 요구 여론을 호도하기 위해 펼치는 기만적 행태와 사이비 논리를 깨부쉈다. 당시 개헌운동의 본질은 살인 군대를 앞세워 정권을 찬탈한 정치군부에 대한 거부였다.
그러나 한국 민주화 역사에서 4·19 의거로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고, 6월 항쟁으로 민주헌법을 제정하는 승리를 거뒀지만 부푼 기대와 달리 곧 실망스럽게 좌절을 맛봐야 했다. 4·19 교수단 시위에서 펼침막을 들고 앞장서 대열을 이끌었던 권오돈 교수(당시 연세대)는 3년 뒤인 1963년 4월 동아일보 좌담회에서 “지금 생각하면 헛일한 셈이지요. 참다운 민주주의의 구현을 바랐었는데 … 민주주의는 아주 먼 곳에 있으니…”라고 허탈한 심정을 토로했다(동아일보 1963년 4월25일 기사). 곧 4·19 승리에도 불구하고 국가폭력의 주체는 경찰에서 군대로 교체되었을 뿐이며, 1987년 6월 항쟁 또한 선거 패배를 자초해 군부 집권의 공작을 막아내지 못했다. 또 2017년 연인원 1500만명이 이룬 촛불혁명이었지만 그 결말은 낭패스럽게도 국가폭력의 주체가 경찰에서 군대를 거쳐 이제 검찰로 승계되는 꼴이었다. 그렇게 정치검찰이 헌법 정신을 짓밟고 권력의 시녀이자 국정농단의 공동정범이 됐다. 다만 양태가 고문 학살 투옥 등 야만적 물리력에서 법조문을 교묘하게 꼬아 만든 그물로 들씌우는 투망질로 바뀌었다.
한겨레 성한용 기자는, 검찰의 정치권력화 배경에 보수언론이 1980년 전두환 신군부 등장을 ‘역사의 필연’으로 평가하고 찬양했던 똑같은 논리로 다시 ‘윤석열 한동훈을 한국 정치를 교정할 수 있는 적임자이자 한국 정치의 시대적 당위성이 있는 신주류’라고 부추기고 교사한 문제를 짚었다(한겨레 2024년 1월8일 성한용 칼럼). 그렇게 보수언론의 비호를 업은 정치검찰이 역사를 거스르는 전횡에 몰입하고 있다. 이를 두고 교수들은 “한줌도 안 되는 정치검찰 패거리가 국격은 말할 것도 없고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고 했다(인천대 교수 선언문).
민주주의의 길엔 수많은 난관과 장애물이 놓여 있다. 민주주의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 로버트 달은 “민주주의 역사는 성공의 역사만큼이나 실패의 역사”라고 했다. “기존 한계를 초월하는 데 실패한 역사이며, 일시적 돌파에 뒤이은 참담한 패배의 역사”라는 것이다(로버트 달 ‘민주주의와 그 비판자들’).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로 민주화 과정에서 패배와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맞닥뜨린 위기와 난관을 극복하고 괄목할 민주주의 발전을 이뤘다. 지금 교수들의 시국선언도 로버트 달이 말한 ‘일시적 돌파’의 민주주의 성공 역사로 기록될 것이다.
한국작가회의는 11월18일 발표한 성명에서 “민주주의는 늘 위기 상태에 있지만, 그때마다 위기를 극복하고 더욱 단단한 민주주의로 회생한다”고 했다. 검찰을 앞세워 자행하는 윤석열 정권 국정농단을 역사의 경고와 교훈으로 새기면서 또 한차례 민주주의 승리를 기약할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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