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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 (화)

무너진 언덕 위의 도시와 ‘더러운 위기’ [아침햇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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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왼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9년 5월29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만났다.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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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윤형 | 논설위원



돌이켜 보면 다 부질없는 사후 객담이겠지만, 2021년 1월20일 4년간의 임기를 시작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사로잡은 감정의 정체는 ‘초조함’이 아니었나 싶다. 취임식이 열리기 불과 보름 전 미국과 전세계를 경악과 공포에 빠뜨렸던 1·6 의회 습격 사건이 있었고, 중·러라는 두 권위주의 국가는 미국이 전후 70여년간 만들고 지켜온 자유주의적 세계질서에 대한 위협이 되려 하고 있었다.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단합’(unity)이었다. 바이든은 취임 연설에서 “정치적 극단주의, 백인 우월주의, 국내적 테러리즘”에 맞서려면 “민주주의에서 가장 얻기 힘든 것인 단합이 필요하다”고 외쳤다.



이는 동맹을 향한 간절한 호소이기도 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4년 동안 내세웠던 ‘미국 우선주의’로 인해 미국의 동맹 관계는 크게 훼손돼 있었다. 바이든은 “동맹 관계를 수복하고 다시 한번 세계에 관여해 가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미국의 분열은 확대됐고, 어렵게 강화한 ‘동맹 네트워크’ 역시 동유럽과 중동에서 터진 ‘두 개의 전쟁’을 효과적으로 틀어막을 만큼 강력하진 못했다. 그리고 지난 5일 치러진 미 대선에서 트럼프는 이론의 여지 없는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



냉정하게 살펴볼 때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한 ‘분명한 판단’을 내린 듯 보인다. 미국은 앞으로 로널드 레이건이 자랑스레 외쳤던 ‘빛나는 언덕 위의 도시’(the shining city on a hill)가 아니게 됐다. 트럼프의 미국은 ‘예외주의’의 화려한 깃발을 높이 쳐든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국가에서 눈앞의 경제적 이익에 매몰된 ‘짐스러운 국가’로 변할 것임이 확실해졌다. 미국이 제공해온 경제·안보 질서 속에서 적당히 ‘무임승차’해온 한국은 건국 이후 가장 엄중하고 구조적인 위기에 직면하게 된 셈이다.



어떻게 대응해 나가야 할까. 두 갈래 길이 열려 있다. ‘가치를 공유’하는 주요 우방인 일본(4.0%)·유럽연합(EU·17.5%)·영국(3.2%)·캐나다(2.0%)·오스트레일리아(1.7%)와 힘을 합쳐 버티는 길이다. 하지만 국제통화기금(IMF)의 4월 세계경제전망 자료에 따르면, 이들 국가에 한국(1.6%)을 합쳐도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0%에 불과하다. 민주주의, 법의 지배, 자유무역 등을 내세우며 한목소리를 낼 순 있겠지만, 한계도 분명하다.



가장 우려되는 문제는 안보이고, 그중에서도 대만이다. 트럼프는 지난달 18일치 월스트리트저널 인터뷰에서 만약 대만 유사사태가 발생하면 “중국에 150~200%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답했다. 대만은 중국이 핵심적 이익 가운데서도 ‘핵심’으로 여기는 문제다. 200%의 관세로 중국을 ‘억제’할 수 있을까. 시진핑 국가주석은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가 그랬던 것처럼 이를 자신의 현상변경 시도에 대한 ‘고 사인’으로 여길 수 있다. 대만이 뚫리면 서태평양에서 미 패권은 타격을 입게 된다. 한반도 문제는 더 언급할 필요도 없다. 미국이 자신을 겨냥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문제만 해결하며 북한과 타협하면, 한·일은 장기적으로 ‘자체 핵보유’의 길로 나아가게 될지 모른다.



두번째는 중·러와 관계를 강화하는 ‘헤징 외교’에 나서는 길이다. 이를 통해 외교적 선택지를 넓힐 순 있겠지만, 오랜 동맹인 미국을 제치는 진정한 의미의 중립 외교를 할 순 없다. 한국은 거대한 힘과 힘이 맞부딪히는 단층선 위에 있다. 듣기 괴로운 소리지만, 고노에 아쓰마로 일본 귀족원 의장은 1900년 10월9일 조선 중립화 교섭을 위해 도쿄에 온 조병식 주일 공사에게 “국방의 엄혹함으로 보자면, (귀국은)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해 있다. 국방에는 다수의 병력·무기가 필요하고, 연안 방비에는 포대와 군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천하에 이(중립화)보다 어리석은(迂闊) 책(策)은 없다”고 나무란 것이다. 오랜 중립국인 스웨덴·핀란드도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 가입했고, 핵을 쥔 북한마저 러시아와 동맹 관계를 복원했다. 동맹과 우방의 도움 없이 우리 혼자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갈 순 없다.



결국, 묘수는 없다. 괴팍하게 변해한 미국의 요구를 수용할 것은 수용하고, 버틸 것은 버텨가며 상당 기간 지금 이 자리에 머물러야 한다. 나라가 많이 힘들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직면해 있는 이 ‘더러운 위기’의 실체이다.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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