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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 (월)

[양해원의 말글 탐험] [235] 영어도 고생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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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꺼풀이 이불만큼 무거워졌다. 시드는 가을, 밤이 길어진 탓인가. 오줌보가 슬슬 보채건만 두꺼운 휘장(揮帳)이 아침잠을 꼬드긴다. 해가 뜨긴 떴나? 커튼으로 스며든 빛으로는 가늠하기 어렵다. 이불 속에서 휴대전화로 해돋이 시각 알아보다 잠기운을 빼앗기고 말았다. ‘일출몰’ ‘월출몰’ 옆에 적힌 ‘시민박명(薄明)’ 때문에.

‘항해박명’ ‘천문박명’은 짐작이 가는데 ‘시민박명’은 무슨 뜻이람? 해 뜨기 전이나 해가 진 뒤에도 맨눈으로 사물을 알아보고 바깥에서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는데…. 영어에 답이 있었다. civil twilight. ‘civil’을 곧이곧대로 ‘시민(市民)’으로 옮긴 것이다. ‘상용(常用)’이라고도 한다는데 역시 어색하다. 차라리 ‘일상박명’이나 ‘통상(通常)박명’이 낫지 않을까.

다짜고짜 옮겨 어색하기가 이만하면 양반. ‘오픈런(open run)’을 보자. 매장 시작 전부터 기다렸다가 문 열자마자 달려가 물건 사는 일을 가리킨다고 언론에서 널리 퍼뜨렸다. 그런데 영어로 ‘open run’은 연극이나 뮤지컬 따위를 기한 없이 공연하는 일일 뿐. 이때 open은 ‘(폐막일을) 정하지 않은’이라는 뜻의 형용사고, run은 ‘공연’을 뜻하는 명사.

이걸 ‘열다(open)’와 ‘달리기(run)’의 조합으로 써먹고 있으니, 어이없다 해야 할까 기발하다 해야 할까. 국립국어원 새말모임(2020년 11월)에서 ‘개장 질주, 개점 질주’로 다듬은 일도 그렇다. 외래어가 어법에 맞지 않게 둔갑해도 받아들인다는 얘기 아닌가. 그럴 바에야 ‘부리나케 달려가 사는 일’을 줄여 ‘부리사’라 하거나 ‘미친 듯이 구매’라는 뜻으로 ‘광구(狂購)’라 하자 하면 ‘오픈런’보다 엉뚱할까.

어떤 시설이나 상가를 새로 열 때면 보고 듣는 ‘그랜드 오픈’은 ‘오프닝(opening)’이 옳다고들 그렇게 떠들어도 백년하청(百年河淸). 영어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도 많지만, 영어도 객지에서 고생이 많다.

[양해원 글지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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