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0억원을 들인 세운상가군 공중 보행로는 단 3년 만에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 세운상가군을 없애고 공원을 만들겠다는 계획에 혈세가 매몰되게 생긴 셈이다. 문제는 이 공원화 계획에 따라 세운상가군 양 옆에 둥지를 튼 작은 공장들의 미래도 흐릿해졌다는 점이다. 서울시는 도심 제조업 보전을 위한 조례가 있지만 제조업은 오히려 흔들리고 있다.
세운상가군 일대 세운재정비촉진구역에는 8개동의 대체 상가가 조성된다.[사진 |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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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묘에서부터 남산까지 이어지는 녹색의 보행로. 우리는 視리즈 '세운상가군 공중 보행로 철거 논란' 1편에서 이 녹색공원을 현실화하기 위한 사업(2009년 당시 초록띠공원 프로젝트)의 그림자를 살펴봤다.
2021년 박원순 서울시장(당시)이 계획했던 종묘와 남산을 남북으로 잇는 공중 보행로는 끊어진 곳 없이 연결됐다. 하지만 3년 만인 2023년에 일부 구간을 철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고, 수장(오세훈)이 바뀐 서울시도 그렇게 방향을 잡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보행자가 늘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공중 보행로를 완성하는 데 투입한 혈세가 1000억원을 훌쩍 넘었지만, 시는 '철거'를 밀어붙이는 모양새다.
사실 박원순 전 시장이 계획하고 만든 공중 보행로든 오세훈 시장이 1기 시절부터 구상했던 지상 녹색공원이든 종묘에서부터 남산으로 이어진다는 건 다르지 않다. 오히려 짚어봐야 할 문제는 세운상가군(세운상가~청계상가~대림상가~삼풍상가~PJ호텔~진양상가~삼풍상가)과 그 양옆으로 펼쳐진 세운재정비촉진지구, 다시 말해 기계금속 부품을 만들어내는 작은 공장과 공구 상가들을 어떻게 할 것이냐다.
박원순 시장 시절에도 '을지면옥'으로 대표되는 과거의 유산을 그저 보전하는 데 그쳤다는 비판이 일었다. 세운상가군의 공중 보행로를 잇고 젊은 제조업 종사자들이 입주했지만 임대료 상승 등의 부작용도 나타났다.
원인은 간단했다. 그 안에서 있는 도심 제조업 생태계를 어떻게 가꿔야 할지를 분명하게 매듭짓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100억원을 투입해 만든 공중 보행로가 3년 만에 철거 결정이 내려진 것도 결국 '보행자 숫자'에만 골몰할 수밖에 없었던 계획의 부재 탓이었다.
서울시가 결정한 세운상가군 개발 계획은 남북 1㎞로 뻗어 있는 세운상가군을 철거하고 그 양옆으로 고층건물을 세우는 방식이다. 지금은 세운상가군을 동서 방향으로 잘라낸 단면은 가운데가 솟아 있고 양옆의 작은 공장 밀집 지역이 낮은 모양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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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개발이 끝나면 이 모습은 반대로 변한다. 세운상가군은 철거돼 평지로 변하고, 낮은 층수의 건물들이 있었던 세운상가군 양옆의 작은 공장 주변엔 고층 건물이 들어선다. 이미 그렇게 된 곳도 있다. 청계상가 서쪽에 생긴 주상복합아파트 등이다.
물론 작은 공장이 갈 곳이 없는 건 아니다. 고층 건물이 들어서는 대체 상가에 새 터전을 마련할 수 있다. 2023년 문을 연 산림동 상생지식산업센터가 대표적이다. 58호의 상가가 들어갈 수 있는 이 건물은 일부 공실이 있지만 세운재정비촉진지구 개발로 인해 터전을 떠난 공장과 상가들이 2023년 6월 입주했다.
완벽한 계획일까. 아니다. 무엇보다 이 계획엔 일종의 '유통기한'이 있다. 10년이다. 공공임대상가를 하나의 사업체에 빌려줄 수 있는 최장기간이 10년이란 거다. 2023년 입주자를 모집한 산림동 상생지식산업센터 입주 공고문에도 임대기간이 명시돼 있다.
2년씩 계약할 수 있고 갱신은 총 5번이 가능하다. 10년을 다 채우면 더 이상 해당 상가를 임대할 수 없다. 그러면 해당 상가들은 10년 후 이곳을 떠나야 한다. 싱가포르를 비롯한 해외국가들이 지역 기여도 등을 따져 공공임대상가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갱신 계약)를 주는 것과 대조적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을지로에 남아 있는 공장을 운영하는 사장님 대부분이 후계자가 없어서 사업을 그만둬야 하는 상황"이라며 "10년 후까지 사업을 지속하는 경우가 많지 않을 것"이라면서 임대 기간을 10년으로 지정한 이유를 설명했다.
그렇다면 10년 후 비어버린 공공임대상가는 어떻게 사용할까. 서울시는 공공임대상가에서 공장들이 나가면 도심제조업 대신 스타트업 등 다른 업종이 들어올 것으로 보고 있다. 2024년 6월 나온 서울연구원의 보고서에서 서울시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이 보고서는 기존 도심 제조업은 쇠락하고 있으며 키워나가야 할 사업은 영상업과 인쇄업이라고 봤다.
세운재정비촉진지구에는 제조업을 위한 상생상가가 들어섰다. 사진은 산림동지식산업센터.[사진 |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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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런 방향성이 서울시의 또다른 정책과 충돌한다는 점이다. 서울은 2022년에 도심 속 제조업을 보호하기 위한 조례를 제정했다. 그만큼 도심 속 제조업을 육성하는 걸 중요한 목표로 삼고 있다는 거다. 하지만 초록띠공원 프로젝트 안에서 도심 제조업은 10년 후면 사라질 분야다. 속내야 알 수 없지만, 표면적으론 키우거나 보전해야 할 대상인 것도 아니다.
이 때문인지 도심 제조업이 맺어왔던 인근 산업과의 관계도 약해지고 있다. 수년 전 종로구 예지동 시계골목이 남아 있을 때 인쇄기가 고장나면 바로 옆에 있는 시계 수리업체에 맡기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연계를 찾아볼 수 없다. 을지로 인쇄업체 관계자는 "인쇄 기계가 망가지면 외부 기술자가 와서 수리한다"며 작은 공장들과의 협업은 많지 않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빨리 시의 밑그림을 바꿔도 괜찮을지, 1000억원이 넘는 돈을 쉽게 매몰시켜도 되는 건지, 또 시의 정책(도심 속 제조업)과 정책이 충돌하진 않는지 등이다. 서울시가 이 모든 걸 숙고하면서 '초록띠공원'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을까.
최아름 더스쿠프 기자
eggpuma@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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