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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1 (목)

'표 안 되는' 기업 전기료만 올렸다…정치셈법에 멍드는 경제 [폴리코노미 위험수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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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정책이 정치적 명분에 의해 흔들리는 ‘폴리코노미(politics+economy, 경제의 정치화)’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특히 정부 개입 최후의 수단으로 인식되던 ‘가격’에까지 정치적 셈법이 적용되면서 가계 살림살이와 기업 경영 판단에도 어려움이 더해지는 중이다.

정치적 판단으로 가격과 시장이 왜곡된 대표적 사례 중 하나가 전기요금이다. 20일 관계 당국에 따르면 이달 기업들은 평균 9.7% 오른 전기료 고지서를 받아든다. 지난달 정부는 ‘물가와 서민 경제 부담’ 등을 고려했다며 주택·일반용 요금은 동결하고 산업용만 올리기로 했다. 한국전력공사의 극심한 재정 위기를 일부 해소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산업계에서는 정치적으로 ‘만만한’ 기업의 부담만 늘렸다는 볼멘소리가 크다. 실제 주택·일반용 요금은 지난해 5월 이후 동결하고 있는데, 기업 대상 요금은 계속 인상되고 있다. 이번 인상에 영향을 받는 산업용 고객은 전체 한전 고객의 1.7% 수준이지만, 이들이 사용하는 전력은 전체의 53.2%를 차지한다.

중앙일보

김주원 기자


전문가는 물가 상승에 따른 민심 이반을 우려한 정치권이 요금 인상을 억지로 막아 오면서 한전의 재정난이 악화했다고 비판한다. 조성봉 전력산업연구회 회장(전 숭실대 경제학과 교수)은 “전기요금을 조정해야 했을 때 이를 미룬 결과가 지금 부작용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며 “이번 전기료 상승은 철강 산업 등 대기업의 경쟁력을 약화하고 수출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돈의 가격’에 해당하는 금리에 정부가 개입하며 시장의 혼란을 키우기도 했다. 가계 대출이 늘자 금융당국은 은행권에 '무리하게 대출을 확대하지 말라'고 주문했다. 이후 은행권이 대출 금리를 올리자 이번에는 "예대금리차 확대는 바람직하지 않다"(5일 이복현 금융감독원장)고 압박했다. 최근 국정감사 지적에 이 원장은 “(금융당국이) 가계 대출 추세를 꺾지 않았으면 최근 한국은행의 금리 인하도 어려웠을 것”이라고도 했다. 은행권에서는 '메시지가 헛갈린다'는 반응이다. '가계대출 관리'와 '내수 부양'이라는 상충하는 정책이 동시에 추진하면서 빚어진 혼선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사실 과거 정권의 지지율 하락 최대 원인 중 하나로 부동산 가격의 급등이 꼽힌다. 이를 막기 위해선 돈을 빌려 집을 사는 가계대출 수요를 억제할 필요성이 크다. 정부가 '관치' 논란에도 불구하고 가계대출 고삐를 죈 정치적 배경이다. 최근엔 집값 상승의 원인이 부동산 정책대출에 있다’는 금융위원회와 ‘정책대출이 원인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국토교통부 간 이견으로 디딤돌 대출 등 정책에서 엇박자가 나면서 부동산 민심은 더 민감해졌다.

중앙일보

김주원 기자



하지만 높은 금리는 내수에 마이너스다. 지지율이 내려앉은 정부 입장에선 그나마 경기라도 부양시켜야 하는 상황인데, 높은 금리는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한다. 지난 8월 한은의 기준금리 동결 결정 이후 대통령실이 이례적으로 “내수 진작 측면에서 보면 아쉽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중앙은행의 의사결정에 정부가 개입하려는 것은 위험한 행위”라며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이유는 정치적 유·불리를 따지지 말고 경제적 논리로 결정하라는 것인데, 정치 논리가 끼어들면 시장이 왜곡될 가능성이 커진다”고 강조했다.

중앙일보

윤석열 대통령과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4월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민생토론회’ 후속조치 점검회의에 참석한 모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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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심과 직결된 물가 문제에서는 품목별로 가격이 튀어 오를 때마다 정부가 이를 때려잡는 ‘두더지 잡기’식 물가 정책이 반복된다. 설탕 가격이 오르면 공정거래위원회가 업체들의 담합 여부 조사에 나서고, 밀가루 가격이 비싸면 농림축산식품부가 기업에 가격 하락에 협조를 당부하는 식이다. 한 경제부처 공무원은 “고물가 문제에 대한 대통령실의 질책이 많았다”며 “부처 입장에선 최대한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방법들을 선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달 종료 예정이던 유류세 인하 조치를 연말까지 연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2년 연속 세수 부족을 겪는 정부에게 ‘소비자물가 상승률 1%대 진입’이라는 명분이 생겼지만, 소비자 기름값이 오르는 데 따른 정치적 부담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시기 한시적 대책으로 나온 유류세 인하는 수명을 12번 연장하며 ‘좀비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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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원 기자


국회도 표심을 고려한 입법을 이어가고 있다. 사회적 관심이 높은 배달 플랫폼 수수료 문제에 대해선 가격 상한제를 도입하는 법이 발의된 상태다. 야당은 또 정부가 농가로부터 쌀을 의무 매입하는 양곡관리법과 농산물 시장가격 하락분을 보전하는 가격 안정제 등을 발의하기도 했다. 한 부처 고위 관계자는 “법으로 가격을 직접적으로 제한하는 것은 반시장적일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가 경제 안정을 유도하고 시장 실패를 해결하기 위해 하는 가격 개입은 불가피한 일이다. 그러나 최근 고물가 상황이 장기화하고 이에 따른 국민 피로도가 높아지면서 시장 가격에 대한 정무적 개입도 일상화하고 있다. 마지막 카드로 쓰여야 할 가격 개입이 계속 누적되면 시장 가격 자체가 왜곡될 수 있다.

전문가는 시장 가격에 직접 손을 대기보다, 가격이 결정되는 구조의 문제를 먼저 풀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안동현 교수는 “시장에서 거래되는 가격을 인위적으로 낮추는 것은 부작용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며 “배달 수수료 문제에서도 시장의 독과점 문제 등을 먼저 해소하려는 대책을 먼저 마련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최후의 방법인 가격 통제를 꺼내 들려는 점이 문제”라고 말했다. 조성봉 전력산업연구회장은 “전기요금처럼 공공부문이 가격을 결정해야 하는 분야라면 독립된 규제기관에서 정하도록 해야 정무적 판단에 의한 시장 왜곡을 막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세종=임성빈 기자 im.soungb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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