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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0 (수)

[단독] 첫 한국계 美 상원 의원 탄생엔 ‘맹부삼천지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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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 120년 새 역사 앤디 김 아버지 김정한씨 인터뷰

조선일보

지난 5일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계 미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된 앤디 김(가운데) 뉴저지주 연방 하원의원의 가족. 제일 왼쪽이 아버지 김정한씨./앤디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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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미국 대선과 함께 치른 의회 선거에서 뉴저지주 연방 하원 의원 앤디 김(42·민주당·3선)이 한국계 최초 연방 상원 의원에 당선됐다. 그의 당선은 한인의 미국 이주 120년 역사에 새겨질 쾌거로 평가받는다. 상원은 대통령 탄핵 심판권, 조약 비준권, 고위 인사 인준권 등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다. 그의 상원 입성으로 한국계의 정치적 위상이 더욱 높아지리라는 기대감이 커진다. 앤디 김은 7일 당선 축하 행사를 뉴저지 체리힐의 한 호텔에서 열었다. 경남 밀양 출신으로 미국에 이민한 김정한(77)·장재순(70) 부부와 다섯 살 아들이 뉴저지로 이사해 집을 구하느라 몇 주를 보낸 그 호텔이다. 37년 뒤, 그 아들이 상원 의원 배지를 다는 모습을 지켜본 김정한씨는 최근 본지 전화 인터뷰에서 “미국에 정착하던 시절이 떠올라서 그저 마음이 울컥한다”고 말했다. 김씨는 하버드대와 매사추세츠공대(MIT) 출신의 유전공학자다. 암과 알츠하이머 질환 치료법을 연구하는 데 일생을 보냈다.

-아들의 당선을 보는 심정이 남다를 것 같다.

“옛 시절이 떠오르더라. 우리 부부는 경남 밀양 사람이다. 나는 내이동, 아내는 부북면 출신으로 고향에서 만났다. 대학(연세대)을 졸업하고 1970년대 초 미국 유학을 왔는데, 그땐 한인 사회 사정이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다. 상원은 고사하고 하원 의원조차 한 명 없었으니까. (1992년 선거에서 캘리포니아에 출마한 김창준 후보가 한인 첫 연방 하원 의원이다.) 힘들게 지냈던 지난 시절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라 가슴이 뭉클해졌다.”

-첫 한인 연방 상원 의원 탄생으로 한국계 미국인들의 정치적 위상이 높아지리라는 기대감이 큰데.

“우리는 미국에 살지만 한국이라는 밑바탕은 절대 바뀌면 안 되고 바뀌지도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리 부부는 이런 생각이 강했기 때문에 아내가 아이들에게 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시켰다. 한국 시를 읽어주기도 했다. 다만 한국에 잠시 (아이들과 함께) 다녀와 보니 그 사이에 아이들이 영어를 잊어버렸더라. 깜짝 놀라 그때부터는 주로 영어만 쓰게 했다.” (앤디 김은 한국어를 거의 못 한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적은 없었나.

“내 전공(유전공학)을 눈여겨보고 당시에 한국 굴지 대기업에서 스카우트를 제안했다. 조건도 정말 좋았다. 미국살이가 녹록지 않아서 아들이 유치원 다닐 때 한국에 갔다. 그런데 그 당시 한국 학교들은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에 몰두하고 있었다. 생활 여건은 좋아질지 몰라도 아이 장래를 생각하면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금방 돌아왔다.”

2018년 앤디 김이 연방 하원 의원으로 미 의회에 진출하면서 아버지 김씨의 인생사(史)도 주목받았다. 그는 어린 시절 부모를 잃은 데다 소아마비를 앓아 몸이 불편한 녹록지 않은 여건에서도 연세대 의대를 졸업한 뒤 국비 장학생으로 미국에 유학했다. 고향 밀양 사람들은 김정한씨를 ‘시련을 이겨낸 수재 소년’으로 기억했다. 밀양중을 함께 다닌 안경환 서울대 명예교수는 “정한이는 어렸을 때 부모를 잃고 인쇄소를 하는 삼촌 집에서 살다 서울의 고교로 유학 갔다”며 “당시 서울대가 장애 학생을 받아주지 않아 연세대에 진학했다고 기억한다”고 말했다. 서울 생활이 여의치 않았던 김씨는 고교를 자퇴하고 검정고시로 대학에 입학했다고 알려졌다.

-미국 생활은 어땠나.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를 다니긴 했지만 아이 둘이 생기면서 네 식구가 살기엔 재정적으로 많이 부족했다. 심지어 가족이 함께 편하게 잘 공간도 없었다. 아이들이 원하는 곳에 쓸 돈이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러 아이들이 놀 수 있는 수영장이 딸린 복합 단지에서 살았다.”

앤디 김에게는 네 살 터울 누나 모니카가 있다. 앤디 김은 시카고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뒤 세계 최고 장학금으로 꼽히는 로즈 장학생으로 선발돼 옥스퍼드대에서 국제 관계 및 정치학을 공부했다. 모니카 김도 예일대 졸업 후 미시간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 위스콘신대 매디슨 캠퍼스 부교수로 역사학을 가르치고 있다. 미국의 외교·군사 개입과 각국의 탈식민지화 과정 등에 대한 연구 성과를 인정받아, 깐깐한 선정 과정과 명예 때문에 ‘천재상(Genius Prize)’이라고도 하는 맥아더 펠로(MacArthur Fellows)에 2022년 선정됐다.

-자식 농사에 크게 성공했다. 자녀 교육 철학이 있다면.

“아이들에게 공부를 언제 얼마나 하라고 시시콜콜하게 말한 적이 없다. 공부는 필요를 느끼는 사람이 스스로 해야 한다고 생각해,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를 알아서 생각하게 하려고 애썼다. 공부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방법의 하나는 (좋은) 학교 근처에 살거나 그 학교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맹자 어머니가 아이 교육을 위해 세 차례 이사한 일)’와 비슷하다. 특히 (아이비리그에 속한) 프린스턴대·하버드대에 자주 갔는데, 학교 캠퍼스엔 공부하는 분위기가 흘렀다. 잔디밭에 가족이 둘러앉아 학생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도서관에 함께 가서 학생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았다. 미술관과 박물관에도 아이들을 많이 데리고 갔다. 내가 앞장서지는 않았다. 아이들이 먼저 보고 싶은 곳에 가게 했고, 궁금한 게 있으면 스스로 답을 찾게 했다.”

-대학생 앤디 김은 어떤 아들이었나.

“한마디로 ‘항상 시간 없는’ 아이였다. 내가 연애를 많이 못 해봐서 아들은 안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니던 교회에 괜찮은 사람이 있어 ‘한번 만나보라’고 했는데 계속 ‘괜찮다’고만 했다. 나중에 ‘대체 뭘 하는데 그렇게 바쁘냐’고 물으니 노숙자들을 도와준다고 하더라.”(앤디는 시카고대 재학 시절 ‘시카고 노숙자 연합’에서 인턴십을 한 적이 있다.)

-아들이 어떤 정치인이 되길 바라나.

“아들의 정치 활동이나 정책에 대해선 내가 할 말이 없다. 아들은 (하원 의원으로 일할 때도) 이미 좋은 정책을 만든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상원에서도 잘하리라고 믿는다. 아들도 나 못지않게 분명히 한국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있을 테니 한국에서도 많이 응원해 주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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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윤주헌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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