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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9 (화)

"발차기로 점수 따는 게 태권도?"…韓 찾은 외국인 200명 '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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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의 '어머니 나라' 한국에 1~2만km 비행기 타고 온 외국인 태권도 지도자들
"존경과 공감의 철학, 정신력 키우는 게 무도 태권도 본질, 점차 사라져 안타까워"
행사 주최한 준 리 글로벌태권도연맹 총재 "80세 외국인 수련자 울먹이는 모습에 감동, 진정한 태권도 본질과 면모 전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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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태권도연맹(GTTF)이 지난달 강원도 곤지암리조트에서 주최한 행사장을 찾은 각국의 태권도 지도자들. 태권도의 모국에서 격파와 호신술 등을 배운다는 의미가 남다르다고 했다. 그들은 또 전통적인 무도로서의 태권도가 변질되는 걸 염려했다./사진=남형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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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사 아이돌 팬 미팅을 방불케 하는 모습이었다.

'위력 격파' 시범이 끝난 뒤, 이를 보여준 강대석 사범을 외국인 30여 명이 삥 둘러쌌다. 깔끔한 흰 도복에는 '태권도'란 글씨가 저마다 쓰여 있었고, 검은띠를 꽉 맨 모습이었다. 줄을 서서 사인받는 모습에서, 몇 번이고 웃으며 사진 찍는 표정에서, 진정 태권도를 사랑하는 이들의 기운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글로벌태권도연맹(GTTF)이 지난달 6일부터 11일까지 곤지암 리조트에서 주최한 행사. 여기엔 5대양 7대륙 약 110개국에서 온 외국인 지도자 200여 명이 빼곡히 공간을 채웠다.

"주먹을 가지고 격파하는 자세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주춤서기 동작, 손날은 45도 각도로 나옵니다. 주먹을 크게 해서 앞으로 전진. 내 체중을 다 사용하기 위해서 이렇게 자세를 만듭니다. 무릎은 격파물에 닿지 않을 정도만 기울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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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력 격파'를 선보인 강대석 사범과 사진을 찍으려 줄을 선 외국인 사범들./사진=남형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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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석 사범이 '위력 격파'를 할 때, 맨 앞에서 맨발로 부단히 따라하는 외국인이 눈에 띄었다. 온통 백발에 체구는 작지만, 선명한 눈빛과 절제되었으면서도 단단한 동작,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만큼은 엄청났다. 열 걸음 떨어진 곳에서도 잘 느껴질 정도였다.

이 많은 이들을 한국에 초청한 준 리 사범이 그를 보며 내게 말했다.

"가운데에 계신 저 분은, 1946년생(만 79세)이세요. 남미 콜롬비아에서 왔죠. 태권도의 '어머니 나라'에서 배워보고 싶은 거예요. 그런 의미가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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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의 모국에서 경험하고 싶어서, 1만4952km를 비행기 타고 날아왔단 게 잘 와 닿지 않았다. 이들에게 태권도는 운동을 넘은 '무언가'일 거라고 짐작했다.


태권도 11년 수련한 美 18세 소녀 "나를 강해지게 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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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8살인 크리치 메디슨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왔다. 준 리 사범이 운영하는 태권도 도장에서 장장 11년을 수련했다.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걸까.

"7살에 태권도를 처음 시작했는데요. 우연히 도장에 왔다가 알게 됐는데, 배우면서 완전히 매료됐지요."

주 5일, 매일 4~5시간 동안 태권도 수련을 했다. 올림픽에 나가 점수를 따기 위한 게 아녔다. 정말 좋아서 하는 거였다고. 어떤 부분이 그리 좋았느냐고 추가로 물었더니 이리 답했다.

"태권도를 하기 전에는 외부 자극에 금방 화내고 자주 다쳤는데요. 지금은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강해졌습니다. 자신감이 생기고 계속 도전하는 삶을 추구하게 됐어요. 학교생활에도 동기 부여가 되고요."

평생 태권도를 할 거라고 했다. 새삼 낯설게 느껴졌던 건, 정작 태권도의 뿌리인 우리나라에선 도장에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던 것 같아서. 성인이 되어서까지 하는 건, 올림픽 선수가 되기 위해(엘리트 체육) 매진하거나 그러다 태권도장에서 가르치는 사범들이 대다수인 것 같아서였다.

이 행사를 함께 만든 글로벌태권도연맹의 스티브 김 사범이 이리 설명했다.

"외국인들이 생애 주기별로 태권도가 가능한 이유가 그거예요. 그들은 올림픽 경기만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올림픽 경기만 생각해서 태권도를 하면요. 10살, 11살, 12살, 15살. 그렇게 지나가고 나면 할 이유가 없어지는 거지요."


의사, 장관, 교수, 회장…사회 영향력 끼치며 '태권도' 수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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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태릉 선수촌에 들어가기 위해 태권도를 10대 때부터 시작한다고. 그 연령대만 할 수 있는 걸로 여겨지고, 다른 이들은 하려고 하지 않는단다. 그렇지 않으면 돌봄 시설에 가깝게, 초등학교 때까지만 태권도를 하는 게 현주소라고 했다.

글로벌태권도연맹이 며칠에 걸쳐 행사를 연 이유도, 맥락도 다 이와 연결돼 있었다. 스티브 김 사범이 이어 설명했다.

"우리가 태권도란 네트워크로 연결된 나라가 140여 개국이거든요. 그 사람들은 다 바쁘시고, 의사 같은 전문직도 많고, 장차관도 많고, 다 그 나라에서 인정받는 분들이에요. 그들이 왜 한국에 온 줄 아세요? 사명 때문이에요. 무도 태권도를 잘 지켜야 한단 걱정 때문에요."

쉽게 설명하면, 우선 대부분 떠올리는 스포츠 경기로서의 태권도가 있다. 발차기를 하고, 점수를 따고, 메달을 목에 거는 게 목적인 운동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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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 리(한국명 이준혁) 글로벌태권도연맹 회장 인터뷰 /사진=이기범 기자 lee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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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 모인 태권도를 사랑하는 외국인들은, 좀 더 본질적이고 정신적인, 삶에 지속적으로 좋은 영향을 주며 수련해야 좋은 도(道)로서의 태권도를 지키고 싶어한단 거였다.


태권도의 '변질' 걱정…"팡팡팡, 와우, 쇼잉에 가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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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타리카에서 수자원공사 사장을 했고, 런던올림픽 국제 심판까지 지낸 넬슨 브리줄라 이야기를 들어봤다. 그는 브루스 리를 보고, 강해지고 싶어서 태권도를 시작했다고 했다. 1972년에 시작해 52년 가까이 태권도를 해왔고 현재 8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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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태권도 국가대표팀 서건우 선수가 10일 오전(한국시간) 프랑스 파리 그랑 팔레에서 진행된 2024 파리올림픽 태권도 남자 80kg급 동메달 결정전 덴마크의 에디 흐르닉 선수와의 경기를 패배한 후 오혜리 코치의 위로를 받고 있다. 2024.8.10/뉴스1 Copyright (C)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사진=(파리(프랑스)=뉴스1)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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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 브리줄라 사범이 이리 비판했다.

"2004년부터 태권도가 조금씩 바뀌어 가기 시작했어요. 모든 태권도가 올림픽 경기, 퍼포먼스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게 문제입니다. 우리의 전통 태권도의 가치, 존경이나 그런 부분에 대해선 그늘에 가려져 있는 게 현실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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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태권도 지도자 핸드폰 케이스에 담겨 있던 태권도 도복. /사진=남형도 기자


인도에서 온 태권도 8단 아베이싱 라토 사범도 비슷한 얘길했다. 그는 1977년부터 태권도를 시작했단다.

"올림픽 품새는 전통 품새가 아닙니다. 팡팡팡, 와우, 와우, 쇼잉이고 엔터테이닝에 가깝죠. 모든 태권도 스타일이 점점 이렇게 돼 가고 있습니다."

요르단에서 온, 88올림픽 태권도 동메달 리스트라는 사범의 뜻도 같았다. 정신적인 부분을 강조해야 한단 거였다.

"무도 태권도가 너무 그늘에 있다보니, 사람들이 경기로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실은 태권도는 정신 수양입니다. 공부할 때 집중력을 길러주었고, 일터에서도 마음이 분산될 때마다 태권도를 수련하며 넘어갔어요. 그런 게 많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점수 따기'를 넘은 태권도의 가치 지키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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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글로벌태권도연맹 행사 중엔 이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위한 포럼도 진행됐다. 몽골민주체육대 조리트 박사가 화두를 던졌다.

"몽골에선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가 태권도입니다. 젊은 세대들이 정말 많이 하고요. 문제는 33년 전부터 몽골에서 발전한 태권도의 방향이 많이 달라졌단 거예요. 스포츠로서 태권도는 전통 태권도와 방향이 많이 다릅니다. 포옹하고 발차기를 하는 건, 점수를 따기 위한 거고요."

태권도의 철학에 푹 빠지는 것. 사범과 숙련된 수련생들을 온 마음으로 존중하고 존경하는 것. 자길 극복하고 정신력을 키우는 것. 이 같은 예절과 문화. 보이지 않는 부분이 깨지는 걸 염려한다고 했다.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 국내에서 태권도장을 운영하는 관장들의 염려도 들어봤다. 이들도 문제의식엔 공감하지만, 생계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했다. 서울에서 태권도장을 운영한 지 2년 됐다는 김진석 사범(가명)은 이리 답했다.

"초기엔 도훈을 5가지 정하고 매일 외우게 하고 지키게 했었는데요. 아이들과 부모들 다 빡빡하다고 좋아하지 않더라고요. 그러다 태권도를 그만두면 그 때문인가 고민하게 됐습니다. 계속 타협하다 보니 복장도 자유로워지고, 어느샌가 뭘 하고 있는 건가 자괴감이 들기도 해요. 어쩌겠어요. 다 생계 때문이지요."

시대에 맞게 진화하려면 어떡할지에 대한 논의. 실버 태권도를 활성화하자고, 경호로서 실용성을 강조하자고, 각 나라에 국기원 같은 공간을 만들자고. 전 세계에서 온 태권도 사랑꾼들이 얘길 주고받던 현장이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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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빈(오른쪽)이 10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의 그랑팔레에서 열린 2024 파리올림픽 태권도 여자 67㎏ 초과급 동메달 결정전에서 로레나 브란들(독일)과 경기하고 있다. 이다빈이 2-1(4-2 5-9 13-2)로 승리하고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2024.08.11. /사진=민경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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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준 리 사범이 간절히 바라던 광경이라 했다.

"나이 드신 분이 태권도 행사장에 울먹이면서 앉아 있었어요. 왜 그러시느냐고 물었지요. 그가 이리 답하더라고요. '제가 평상시에 생각하고 상상하던 걸 여기 와 직접 보니 행복해서 그렇습니다'라고요. 그걸 보니 저도 울컥해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태권도를 이리 좋아해 주는 이들이 있으니, 모국으로서 모범을 보여야 하지 않겠느냐고. 중요한 걸 잃지 않고 잘 지켜야 한다고. 준 리 사범이 바라는 당연한 꿈에, 마음이 절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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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형도 기자 huma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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