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14일 플로리다주 마러라고 리조트에서 열린 ‘미국 우선 정책 연구소’ 행사에 참석해 있다. AP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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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국은 수년간 우리를 이용했다. 우리는 일자리를, 수익을 잃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얻었고, 우리의 사업은 몰살됐다. 이제 그들이 일자리를 빼앗고, 약탈하는 걸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는 지난 7월18일 공화당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연설한 장소는 미국 위스콘신주 밀워키. 위스콘신은 과거 자동차 생산 중심지였지만 지금은 러스트벨트(쇠락한 공업지대) 가운데 하나다. 밀워키에서 차로 한시간 거리인 제인즈빌엔 85년간 돌아가던 제너럴모터스(GM) 공장이 있었지만, 2008년 문을 닫았다. 위스콘신의 지지자들은 트럼프에게 환호했고, 그를 다음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미국 우선주의의 깃발이 다시 올랐다. 미국 이익을 최우선으로 놓는 트럼프노믹스 2.0에서 ‘보호무역주의’는 핵심이다. 관세 및 비관세 장벽을 낮추고, 상품과 서비스의 자유로운 이동을 추구하는 ‘자유무역주의’는 ‘악’, 그 옹호자나 수혜 동맹국은 ‘적’으로 삼은 트럼프다. 한국을 비롯해 여러 나라와 양자·다자 자유무역협정(FTA)을 맺고, 자유무역의 가치를 설파하던 미국은 이제 없다.
트럼프노믹스 2.0은 ‘관세’를 보호무역의 강력한 수단으로 삼는다. “관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라며 자신을 “관세맨”이라고 부른 트럼프는 미국으로 수입되는 물품에 ‘보편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공약했다. 모든 수입품에 관세율을 10~20%포인트 더하고, 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엔 60%의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방침이다.
트럼프 당선으로 세계 경제에 불확실성이 커졌지만, 확실한 것도 있다. 관세 부과로 얻고자 하는 미국의 이익이다. 가장 강조하는 건 ‘무역 적자의 축소’다. 지난해 상품과 서비스를 포함한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는 7734억달러(약 1077조1900억원)였다. 상품 무역 적자는 전년보다 10.3% 줄어 1조617억달러(약 1478조7400억원)였다. 트럼프의 공약을 반영한 공화당 새 강령 제5조 ‘불공정 무역으로부터 미국 노동자들과 농민들 보호’는 ‘보편관세’를 제시하며 “미국의 상품 무역 적자는 연간 1조달러 이상”인 점을 함께 적시했다.
대미국 무역 흑자국들은 관세 폭탄 사정권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앤드루 틸턴 골드만삭스 아시아태평양 담당 수석은 “트럼프 행정부 1기부터 미-중 무역 적자는 조금 줄었지만, 다른 아시아 수출 국가와의 무역 적자는 크게 늘어 이에 대한 조사를 강화할 수 있다”고 밝혔다고 미국 시엔비시(CNBC)는 11일 보도했다. 틸턴 수석은 한국과 베트남 등을 언급하면서 “트럼프는 적자를 줄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어, 증가한 무역 적자가 결국 다른 아시아 국가에 관세를 부과하게 만들 수 있다”고 덧붙였다. 미국 상무부 자료를 보면, 지난해 미국의 대한국 무역 적자 규모는 사상 최대인 514억달러(약 71조8510억원)에 이른다. 올해도 적자 폭이 증가 추세를 보여 연간 최대치를 다시 갈아치울 가능성도 있다.
관세 장벽을 앞세운 보호무역주의 강화가 세계의 경제성장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달 22일 공개한 세계경제전망 보고서에서 미국과 중국, 유로존(유로화를 쓰는 유럽 20개 나라)이 수입품에 10% 관세 인상을 도입하면 세계 경제성장률이 2025년 0.8%, 2026년에는 1.3% 감소할 것이라고 밝혔다. 내년 미국 성장률은 1%가량 내려갈 것으로 예상했다.
보호무역주의가 부메랑이 되어 미국 경제에 오히려 타격을 준다는 경고도 있다. 관세 부과 등을 통한 무역전쟁이 수입 원자재 가격 상승 등에 따른 경영난을 불러 제조업 일자리를 줄였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경제분석기관 옥스퍼드 이코노믹스는 미-중 무역전쟁으로 2018~2019년 미국에서 24만5천개의 일자리가 감소했다고 봤다.
이런 경고에도 강경한 보호무역주의자가 트럼프 행정부 2기 통상 정책을 이끌 인물로 거론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와 월스트리트저널 등은 트럼프 인수위원회가 1기 행정부에서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를 맡아 통상 정책을 수립하고 도입한 로버트 라이트하이저에게 다시 이 자리를 제안했다고 보도했다. ‘자유무역이라는 환상’이라는 책을 지난해 펴낸 라이트하이저 전 대표는 트럼프 1기 때 철강, 알루미늄 등에 고율 관세 부과를 비롯해 미-중 무역전쟁을 주도한 인물이다. 지난달 24일 비영리단체 인터컬리짓연구원이 공개한 대담 영상에서 로버트하이저는 “균형 잡힌 무역으로 돌아가기 위해 보편관세가 필요하다”며 “부가 해외로 이전되는 것을 중단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또 중국에 “상당한 관세의 부과가 필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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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경제 대국인 미국의 ‘보호무역주의’ 선회와 트럼프 복귀는 자유무역 시대가 거의 끝에 다다른 현실을 보여준다.
특히 자유무역주의 기반의 세계 통상 질서에서 중심축을 맡았던 국제기구인 세계무역기구(WTO)의 앞날이 불투명하다. 내년 1월 창립 30년을 맞는 세계무역기구는 중추 기능이 마비된 데 그치지 않고, 존립도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트럼프 1기 행정부는 세계무역기구가 미국의 주권을 침해하고, 불공정한 결정을 내린다고 했고, 주요 기능을 마비시켰다. 2017년 미국은 세계무역기구의 ‘상소 기구’에서 심리를 하는 상소위원의 선임을 거부했고, 새 위원이 채워지지 않아 2019년 말부터 분쟁해결 기능을 잃었다.
세계무역기구의 운명은 창립을 주도했던 미국의 선택에 달렸다. 미국이 세계무역기구의 사망 선고와도 다름없는 회원국 ‘탈퇴’라는 수를 둘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 상무부 장관을 지낸 윌버 로스는 정치전문매체 더힐 기고문에서 “미국 무역 적자의 진짜 범인은 세계무역기구”라며 미국의 무역 균형을 개선하는 데 장애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세계무역기구 개혁 필요성을 강조하며 미국의 탈퇴 가능성을 언급했다. 로스 전 장관은 “트럼프의 보편관세 아이디어는 미국의 세계무역기구 탈퇴를 강제할 가능성이 크다”며 “이는 다른 회원국들에 1조달러의 피해를 줄 수 있다. 미국이 입을 피해보다 크다”고 덧붙였다.
‘악의적 방치’로 미국이 세계무역기구를 무력화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 세계무역기구 사무총장은 내년 2월 임기가 끝나 재임에 도전하고 있다. 만장일치로 선임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미국이 반대하면 재임은 불가능하다. 파이낸셜타임스는 트럼프 1기 행정부가 오콘조이웨알라 사무총장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점을 짚고, 트럼프 2기에서 세계무역기구를 “악의적 방치”로 대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도했다. 이런 우려에 세계무역기구는 차기 사무총장을 뽑기 위한 특별 이사회를 이번달 말 열기로 했다. 그러나 만장일치 합의에 이르지 못해 내년 1월20일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까지 논의가 미뤄진다면 세계무역기구 수장 선출이 불가능해질 수 있는 상황이다.
자유무역 질서의 쇠락 속에 선진국과 선진국 대열에 오른 나라들은 무역 장벽을 높이는 중이다. 세계무역기구는 18, 19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진행되는 제19차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이들 회원국에서 무역 장벽 조처가 증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13일 세계무역기구가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주요 20개국은 2023년 10월부터 올해 10월까지 91개 무역 제한 조치를 시행했다. 무역 장벽은 대부분 수입품을 대상으로 했고, 세계 수입품에서 그 점유율은 올해 10월 9.4%가 됐다고 밝혔다.
이정연 기자 xingx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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