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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9 (화)

[김철중의 생로병사] 속삭인 줄 알았는데 난청이라니… 갑자기 사람 변하면 질병일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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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일러스트=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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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벨기에에서 벌어진 일이다. 40세 남성이 음주 운전으로 적발됐다. 그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음주 측정 검사에서 엄연히 처벌 수준의 알코올 수치가 나왔다. 주장이 먹힐 리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끝내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했다. 괘씸죄로도 걸릴 판이다. 결국 그는 음주 운전으로 벌금과 운전면허 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 남성은 수년에 걸친 법정 다툼 끝에 음주 운전 무죄판결을 받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는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몸에서 알코올이 생성되는 희소 질환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자동 양조장 증후군이다. 내인성 에탄올 발효병이라고도 한다. 섭취한 탄수화물과 당 성분을 위장관에서 박테리아나 진균이 발효시켜 맥주처럼 알코올이 생성되는 매우 드문 질환이다.

자동으로 생성된 알코올은 소장에서 흡수되어 혈중 알코올 농도를 높인다. 심하면 술에 취한 사람처럼 말을 더듬거나 얼굴이 빨갛게 되고, 메스꺼움이나 어지럼증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사람이 음주 운전으로 걸리면, 가족, 친구, 직장 동료에게 알코올 과용 사실을 숨기고 몰래 술을 숨겨 놓고 마시는 소위 ‘옷장 속 술꾼’으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이 남성은 자신에게 그런 질병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실제로 술을 마시지 않았기에 음주 운전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주변 사람들도 그를 믿고 세 의사에게 진료를 받아보게 했고, 마침내 그는 자동 양조장 증후군 환자라는 진단서를 받아 쥐었다. 그러자 법원이 술 마시고 운전을 한 것은 아니기에 음주 운전 무죄판결을 내렸다. 다만 법원은 이 남성에게 운전하기 전에 알코올 발효가 우려되는 식단을 피하고, 운전할 때마다 음주 운전 검사에 쓰는 호흡 측정기 검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몸통이 양조장인 사람이 지켜야 할 숙명이다.

자동 양조장 증후군은 간질환이 있거나, 소화기 수술을 받았거나, 항생제를 장기간 복용했거나, 당뇨병을 앓는 경우 등일 때 생길 수 있다고 한다. 진단은 발효가 일어나기 쉬운 포도당을 투여한 후 혈중 알코올 농도 수치 변화를 관찰하는 것으로 한다.

사람 몸에서는 별의별 일이 일어난다. 그럴 사람이 아닌데, 평소와 달리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다면, 혹시 질병은 아닌지 의심해 봐야 한다. 실제 의학적 사례는 다양하다.

평소 점잖은 중년 남자가 최근 과도하게 화를 내고 짜증을 냈다. 기뻤다가 슬펐다가 감정 기복도 심해졌다. 이럴 사람이 아닌데 싶어 가족이 병원에 가보자고 설득해서 이것저것 검사했다. 그 결과, 갑상선 기능 항진증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갑상선 기능이 과도하게 높아지면, 호르몬 과다로 감정이 불안정해지고 쉽게 짜증을 내거나 예민해질 수 있다.

반대로 성격이 평소와 달리 소극적이고 소심하게 변했다면, 갑상선 기능 저하증을 의심해 볼 수 있다. 철분이 부족해도 우울한 경향이나 무관심 태도를 보인다. 사람이 아주 신경질적으로 변한 경우, 칼슘을 높이는 부갑상선 기능 저하증이 원인일 때가 있다.

갑작스러운 성격 변화나 예상치 않은 과격함 또는 온순함, 과도한 수다스러움, 평소에 하지 않던 충동 구매 등은 초기 치매나 뇌종양일 때 생길 수 있다. 삶을 통제하는 사령부 전두엽 기능이 떨어진 탓이다. 즐기던 취미 활동이 시들해지거나, 친한 모임에 나오지 않으면, 사이가 멀어진 것이 아니라 우울증의 시작일 수 있다. 외출 건수는 우울증 지표다.

나이 들어 난청이 생기면, 대화를 잘 알아듣지 못하거나 상대에게 거듭 물어보는 일이 잦아진다. 대화를 기피하고 다소 큰 목소리로 자기 말만 할 때도 있다. 고집불통이 됐다고 생각 말고, 청력 검사를 받아 보게 하는 게 좋다. 친한 누군가가 알은체 안 하고 지나갔다면, 우선 시력이 나빠진 탓으로 보자.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이라는 말이 있다. 일본에서 크게 인기를 끈 고령자들의 정형시(일본 센류) 모음 책 제목이다. 오십 줄을 넘어서면 이런 일이 흔히 생긴다. 뭔가가 근사하게 보여서 콩깍지 낀 줄 알았는데 백내장이고, 속삭임인 줄 알았는데 난청인 것이다.

나이 오십 줄을 넘어서면 대체로 성격이나 태도가 잘 안 바뀐다. 그런데 큰 변화가 생겼다면, 일단 의학적 원인을 살펴보자. 그럴 사람이 아니다 싶으면, 사람을 믿으시라.

[김철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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