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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9 (화)

[정동칼럼]자치입법권 포기한 지방자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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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지방자치 부활 이후 33년이 지났다. 흔히 지방자치를 ‘풀뿌리 민주주의’라고 표현하는데, 과연 지방자치로 인해 주민들의 삶은 좋아졌을까?

지방자치를 통해 생긴 긍정적 변화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조례가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예를 들면 한때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던 학교급식 조례 제정 운동을 통해 친환경 무상급식이 확대됐다. 농촌지역에선 농민수당 조례 제정 운동을 통해 적은 금액이나마 농민들에게 농민수당이 지급되기 시작했다.

정보공개제도, 주민참여예산제도 같은 중요한 제도들도 지역에서부터 조례로 시작되어 국가적인 법제화로 이어졌다. 1991년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행정정보공개조례가 최초로 제정되었고, 이는 1996년 국가 차원의 정보공개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2003년부터 광주광역시 북구, 울산광역시 동구 등지에서 시작된 주민참여 예산제도는 이후에 지방재정법 개정을 통해 전국적으로 의무화되었다.

물론 조례가 가진 한계도 있다. 우선 조례는 상위 법령을 위반할 수 없다. 주민 권리를 제한하거나 의무를 부과하는 경우, 또는 벌칙을 정하려는 경우에는 법률의 위임이 있어야 한다. 이를 위반하면 조례가 무효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한계들을 잘 분석해보면, 두 가지 방향으로 조례를 제정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첫째, 주민 권리를 확대하는 조례는 제정할 수 있다. 국가 차원에서 규정된 것보다 주민에게 더 많은 복지혜택을 제공한다든지, 주민의 ‘알권리’를 확대한다든지 하는 조례는 제정이 가능한 것이다. 행정에 대한 주민참여나 지방의회에 대한 주민참여를 확대하는 조례도 제정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

둘째, 상위법률의 위임이 있는 경우에는 권리 제한이나 의무 부과에 관한 조례도 제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상위법률의 위임만 있다면, 주민의 건강권·환경권을 지키기 위해 환경오염시설이나 난개발을 규제하는 것도 가능한 것이다.

조례를 제정할 수 있는 ‘입법 공간’이 이렇게 존재하기에,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조례들이 제정 또는 개정되어 왔다. 예를 들면 전라북도 익산시의 경우엔 전국에서 유일하게 실효성 있는 ‘환경정책위원회 조례’가 있다. 환경정책위원회는 여러 지역에 설치되어 있는 위원회이지만, 그 역할이 크지 않다. 그런데 익산시의 경우엔 시민사회의 제안으로 조례를 개정해서 환경오염 우려가 있는 각종 시설에 대한 인허가 신청을 심의하는 역할을 환경정책위원회가 하고 있다. 위원회의 위원장도 민관이 공동으로 맡는 형태이고, 위원으로도 시민단체와 전문가들이 참여하고 있다.

그리고 주민들의 ‘알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사전고지 조례가 제정되는 지방자치단체도 늘어나고 있다. 사전고지 조례는 환경오염이나 난개발 우려가 있는 사업에 대한 인허가 신청이 접수되면 반드시 주민들에게 알리도록 하는 조례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사례들이 충분히 확산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방의회 및 지방자치단체 집행부의 무관심이나 소극적 태도때문이다. 그래서 스스로 행사할 수 있는 자치입법권에 대해서도 손놓고 있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다. 상위법률에서 조례로 정할 수 있게 위임한 부분에 대해서도 조례를 제정 않고 방치하고 있는 지역들이 있다. 대표적 사례가 환경영향평가 조례이다. 환경영향평가 조례를 제정하면, 환경영향평가 대상 사업을 국가 차원에서 정한 것보다 확대할 수 있다. 가령 환경영향평가법 시행령에선 하루 100t 이상 소각하는 시설을 환경영향평가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조례를 제정하면 하루 50t 이상 소각시설도 환경영향평가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러니 환경영향평가 조례를 제대로 제정하면 주민들의 환경권, 건강권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런데 2024년 11월17일 기준으로 전국 17개 시도 중 충남·충북·경북·전남·세종·울산의 6개 시도는 환경영향평가 조례가 제정되어 있지 않다. 또한 조례가 제정되었지만 부실한 지역도 있다.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권리를 확대하는 것은 지방자치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스스로 행사할 수 있는 권한조차 손을 놓고 있다면, 지방자치의 존재 의미가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다른 한편으로 지역의 주권자인 주민들도 우리 지역 조례를 바꾸는 것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지방자치단체 조례는 주민들의 서명으로 조례안을 발의할 수 있다. 2026년엔 지방선거도 있다. 조례에 무관심하고, 지역문제 해결에 의지가 없는 정당이나 지역정치인을 심판하는 것도 유권자가 해야 할 일이다.

경향신문

하승수 공익법률센터 농본 대표


하승수 공익법률센터 농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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