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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8 (월)

페이커로 본 리더의 자격 [여기 힙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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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1으로 본 완벽한 팀원의 조건

조선일보

페이커 /라이엇게임즈


#1. “나 이거 혼자서 잭스 교육 좀 할게.(다소 의역 : 단독 행동)”<제우스 최우제>

“아리만 텔이야 우제야(다소 의역 : 위험하다)”<페이커 이상혁>

“형 갈리오 궁 봐줄래? 살만해(다소 의역 : 도와줘!)” <제우스 최우제>

“어 봐줄게 봐줄게.(다소 의역 : 도와줄께!)”<페이커 이상혁>

지난 3일 영국 런던 O2 아레나에서 열린 ‘2024 리그 오브 레전드 월드 챔피언십(롤드컵) 결승전’의 한 장면입니다. 이 경기에서 페이커 이상혁의 T1은 롤드컵 5회 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달성했습니다.

온라인게임 리그오브레전드(LoL·롤)는 5명이 한 팀이 돼 상대 팀과 겨루는 게임입니다. 기본적으로는 각자의 구역에서 상대 팀원과 싸우지만, 내가 혼자 있는 상황에서 상대 팀원이 다수가 된다면 전투에서 질 확률이 높아집니다. 상대의 전술을 미리 파악해 이런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고, 합심해 전투를 준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롤에서 팀합의 중요성이 요구되는 이유입니다.

1996년생인 페이커는 현재 28세입니다. 함께 프로게이머를 데뷔한 친구들은 대부분 감독과 코치를 하고 있습니다. 페이커와 한 몸처럼 움직여야 할 팀원들은 2002년생인 오너 문현준, 이민형 구마유시, 케리아 류민석과 2004년생인 제우스 최우제입니다. 이 중 세 명은 T1 아카데미 연습생 출신입니다. 페이커 입장에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경기를 하는 셈입니다. 그것도 젊은 나이에 연봉을 수십억씩 받는 잘 나가는 친구들입니다.

이 들을 데리고 세 번이나 결승전을 가고, 두 번의 국제 대회 우승을 이뤄낸 페이커의 리더십 비결은 무엇일까요? 평소에는 완벽해 보이지 않았던 이 팀이, 큰 대회만 가면 수퍼팀으로 변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돈이 되는 여기 힙해 스물 아홉 번째 이야기입니다.

<1>비난 말고 도와줘라

조선일보

우승 후 인터뷰 중인 T1/라이엇게임즈


앞의 #1 상황을 보겠습니다. 페이커는 제우스의 단독 행동이 경험상 사뭇 불안하지만, 절대 “가지마”라고 붙잡지 않습니다. 제우스도 본인의 판단 하에 움직이는 것일텐데, 여기서 붙잡는다고 경기가 좋아진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제우스의 판단에 맡기돼, 본인이 판단한 상황을 알려주기만 합니다.

이러다 결국 제우스가 상대의 수에 잡혀 곤경에 처해 “도와달라”고 하자, 군말 없이 바로 “도와줄께”하며 달려갑니다. “그러길래 내가 조심하라고 했지!” 등의 잔소리는 없습니다. 지금 해야할 건 비난이 아니라 도움이기 때문입니다. 아찔했던 이 장면은 오히려 스노우볼처럼 굴러가 우승을 이뤄낸 장면이 됩니다.

경험이 많다는 건 그만큼 눈에 보이는 시나리오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상황이 그 시나리오처럼 굴러가라는 법은 없습니다. 젊은 선수(회사에서는 직원)들도 “이 상황을 망치겠다”며 무언가를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잘 해보겠다”고 덤빈 일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을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 팀장, 혹은 숙련자들이 해야할 일은 “비난이 아닌 도움”입니다. 비난을 하면, 뒤에는 그러한 시도조차 하지 않을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지요.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는 조직은 발전할 수 없습니다.

<2>말은 적게, 결단은 빠르게

조선일보

같은 곳을 바라보는 팀원들 T1/라이엇게임즈


리그오브레전드는 마이크를 착용하고 서로의 상황을 분석하고 지시하며 움직이는 게임입니다. 페이커는 주장이지만 많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른 팀원들의 말을 듣고 움직입니다.

그가 입을 여는 순간은 여러 명의 의견이 갈리거나, 전투에서 졌을 때 입니다. 여러 명의 의견이 갈리면, “오른쪽”이라고 방향을 정해주고, 팀원들이 전투에 져 사기가 꺾이려고 하면 “괜찮아”, “문제 없어” 등의 말로 멘탈을 관리해줍니다. T1이 큰 경기에 강한 이유입니다.

선장이 많으면 산으로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의 일을 두고, 여러 지시 사항을 내려오면, 팀원들은 갈 길을 잃게 됩니다. 이럴 경우 리더의 역할은 가아할 길을 알려주고, 중심을 잡아주는 것입니다. 혼란스럽지 않게 빠르고 정확하게 알려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경기가 끝난 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전 경기에서 잘못을 지적하고, 상황을 지시하는 건 감독과 코치에게 일임합니다. 꼬마 김정균 감독이 제우스 최우제를 격려하며 지시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휴대폰을 보며 “인정”이라는 말만 덧붙입니다. 개입해야 할 때와 물러나 있을 때를 정확하게 아는 것입니다.

<3>위기에서 빛나는 ‘미움 받을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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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하고 감격하는 T1/라이엇게임즈


페이커의 리더십은 위기의 순간 더욱 빛납니다. 국제 대회 결승이라는 건 세계에서 가장 잘 하는 두 팀이 만났다는 것입니다. 정상적으로 붙는다면 막상막하의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위기에 처했을 때는 난세를 타계해줄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그 역할을 해야하는 건 리더입니다.

페이커는 모두가 절망해있을 때 “내가 넘겨줄게”라는 말과 함께 조커 플레이들을 선보입니다. 이런 플레이를 하고 진다면 욕을 혼자 다 먹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는 늘 욕받이를 자처하고 이런 리더십을 보여줍니다. 흔히 말하는 ‘미움 받을 용기’입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명운이 달린 프로젝트를 두고 두 회사가 프리젠테이션 중입니다. 우리의 발표가 끝나고, 상대 팀의 발표가 시작됐습니다. 상대팀은 예상을 뛰어넘는 발표로 관계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승리의 기운을 가져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패색이 짙어지는 쪽의 리더라면 마이크를 빼앗아 노래라도 부르며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는 ‘한 칼’이 필요한 것이지요. 침몰하는 배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리더가 아닙니다.

<4>의심하지 않고 움직이는 ‘호구론’

조선일보

소년지화의 오너 문현준/라이엇게임즈


“전 잘 모르겠던데, 형이 하라고 하니깐 했죠. 운이 좋았죠.”

지난주 오너 문현준은 결승전 복기 방송에서 이 같이 말했습니다. 물어볼 시간도 없는 정신없는 승부의 현장, 오너는 리더의 지시에 의심없이 움직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다른 팀원들도 일단 “리더가 하자”고 하면, 일단 수행합니다. 모두가 최고의 선수들로 이뤄진 팀,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입니다. 이 모습에 게임해설가 강퀴 강승현은 “T1은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다. (전투에서 패하고 나면) 그 곳은 공동 묘지가 된다”고 했습니다.

리더라고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 역시 무언가를 지시할 때 많은 의심과 걱정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팀원들이 따라주지 않을 때와, 일단 믿고 따라줄 때, 그 결과는 확연히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정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오너 문현준입니다. 그는 가족의 반대 등으로 프로게이머치고는 늦은 나이인 18세에 T1 아카데미에 들어갑니다. 지난해 팀의 위기 상황에서는 “가장 예쁜 꽃은 우여곡절을 겪고 피는 꽃”이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지요. 그는 자신의 다큐멘터리 ‘소년지화(少年之花)’에서 이 같이 말합니다.

“팀에 호구 한 명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팀이 또 잘 돌아가고, 조화롭게 되지 않을까요?”

좋은 리더는 좋은 팀원이 만드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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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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