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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 (금)

늘어나는 인생 시계… 83세도 대학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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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최고령 응시, 임태수 할머니

조선일보

202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진 14일 오전 서울 마포구 홍익대학교사범대학부속여자고등학교에서 일성여중고 최고령 응시생 임태수 할머니가 고사장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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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오전 7시 30분쯤 서울 마포구 홍대부속여고 정문 앞. 돋보기 안경을 쓴 할머니가 책가방을 메고 한 손엔 도시락 가방을 쥔 채 나타났다. 올해 대학수학능력시험 최고령 응시자로 추정되는 임태수(83)씨다.

“엄마도 대학 간다. 일성여고 파이팅” “언니, 잘 보고 와” 임씨가 나타나자 30여 할머니가 응원 메시지를 외쳤다. ‘여보, 등록금 준비해’ ‘엄마의 꿈을 응원해’라는 손팻말도 들었다.

임씨는 “내년엔 손주들과 같이 대학생이 된다. 오늘 수능 잘 보고 ‘대한민국 고등학생 생활’을 잘 마무리 짓겠다”고 말했다. 이날 연차 휴가를 쓴 아들(54)이 임씨를 수험장으로 데려다줬고, 도시락은 딸(56)이 싸줬다. 임씨는 응원하는 이들을 향해 “파이팅”을 외친 후 고사실로 들어갔다.

이날 고사장 앞에서 선배를 응원하던 원모(70)씨는 “이 나이에 공부를 하고 자신의 수준을 평가받고자 수능까지 치르는 선배들이 부럽고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일성여중고에서 중3 과정을 밟고 있다. 그는 “우리 학교에 전쟁 때문에 대학을 못 간 사람들이 이제야 뭐라도 배워보겠다고 온 경우도 있다”면서 “같은 시대에 태어난 우리끼리 느껴지는 애환이 있어서 오늘 수능 치는 선배들을 보니 괜히 내가 눈물이 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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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대학수학능력시험 최고령 응시자로 추정되는 임태수(83)씨가 14일 오전 시험장인 서울 마포구 홍대부속여고 앞에서 활짝 웃으며 ‘파이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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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꿈이 ‘교사’였던 임태수씨는 아버지 병환으로 중2 때 학업을 중단했다. 결혼 전엔 아버지 병간호와 집안일을 도맡아 했고, 결혼 후엔 4남매 키우느라 시간이 훌쩍 지났다. 이젠 손주 3명 모두 대학생이 됐다. 그러다 지난해 여든이 넘은 나이에 다시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가족들 몰래 일성여중고에 등록했다. 일성여중고는 제때 학업을 마치지 못한 만학도들이 중·고교 과정을 공부하는 학력 인정 평생교육 기관이다. “딸이 ‘엄마는 왜 말도 없이 학교에 등록했느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내가 공부하고 싶으니까 간 거지, 다른 이유가 있느냐’고요.”

처음엔 늦은 나이에 학교를 다니는 게 부끄럽기도 했다. 그런데 입학식 날 수많은 또래 만학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임씨는 “‘나이가 많아도 나처럼 배움에 목마른 사람이 참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면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공부를 그만두고 싶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하고 싶었던 공부였지만, 뒤늦게 공부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집 근처 독서실에 가서 하루 3~4시간씩 공부했다. 영어 단어를 열심히 외워도 이튿날이 되면 까마득해졌다. 그래도 임씨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다시 외웠다. 그는 “듣기 문제도 안 들리고, 단어 외우는 것도 어려워 영어 과목이 제일 자신이 없다”며 “그래도 수학은 자신 있다”고 말했다. 다리가 안 좋은데 양천구 집에서 마포구 학교까지 왕복 2시간을 전철 타고 다니는 것도 도전의 연속이었다. 오르막길을 오를 땐 서너 번씩 앉아서 쉬었다 다시 일어나길 반복했다. 그래도 공부를 쉰 건 무릎 인공관절 삽입 수술 후유증으로 다리에 마비가 왔던 4개월간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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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씨는 이미 수시 전형으로 백석예대 실버케어비즈니스학과와 숙명여대 평생교육원 사회복지학과에 최종 합격했다. 둘 다 수능 성적이 없어도 진학하는 데 문제가 없다. 그런데도 수능을 친 것은 일성여중고 측이 ‘수능은 대한민국 교육과정에서 꼭 거쳐야 하는 관문’이라며 응시를 권장했기 때문이다. 임씨는 “대학 가면 동아리도 들고, MT도 가고 다양한 걸 해보고 싶다”면서 “건강이 받쳐주는 한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계속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이번 수능에는 일성여고 학생 107명이 응시했다. 임씨를 비롯, 홍대부속여고에서 수능을 친 만학도가 56명이었다. 이들이 정문에 들어서자 시험장 관계자들이 학부모로 착각하기도 했다.

이날 수능을 친 또 다른 만학도 정봉숙(56)씨는 “남편이랑 아들이 시험 잘 보고 오라고 용돈도 줬다”고 환하게 웃었다. 그는 어린 시절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학교에 다니지 못해 밤마다 매일 혼자 울었다고 한다. 정씨는 “우리 아이들에게 ‘엄마도 이렇게 최선을 다한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며 “앞으로도 새로운 일에 망설이지 않고 도전하며 멋진 삶을 만들어가겠다”고 말했다.

87세 학생 김갑녀씨도 올해 수능을 볼 계획이었다. 김씨는 해방 후 한글을 배우려고 했지만 어머니가 말렸다고 한다. 동생들 돌보고, 밭일하는 게 집안 형편에 더 도움이 된다는 이유였다. 그는 수능 원서를 제출하고, 지난 9월 모의고사까지 봤지만 실제 수능은 보지 않기로 했다. 오랜 시간 앉아서 문제를 푸는 게 신체적으로 무리라는 판단에 교사들이 설득한 끝에 응시를 포기한 것이다.

재작년과 지난해 최고령 응시자로 추정된 이주용(82)씨, 김정자(83)씨도 일성여고 출신이었다. 임태수씨의 담임인 김은경(50) 교사는 “자녀들을 수험장에 데려다주던 어머니들이 이제 수험생이 되어 자녀들에게 ‘이번 수능 너무 어려웠다’고 얘기하는 걸 보면 참 흐뭇하다”면서도 “어르신들이 어린 학생들을 보며 ‘나도 저때 (학교에) 왔으면 달랐을 텐데’라고 말할 때는 마음이 저린다”고 했다.

고령화 추세에 따라 일성여중고 학생들의 연령대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80대 졸업생은 지난 2019년 2월 12명에 불과했지만, 지난 2월엔 42명으로 늘어났다. 70대 졸업생도 118명에서 5년 만에 212명이 돼 2배 가까이로 늘었다. 일성여고 관계자는 “2010년대만 하더라도 50대 학생이 많았지만 최근엔 6070세대가 주를 이룬다”면서 “80대 졸업생이 계속 늘어나는 걸 보고 고령화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는 걸 체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도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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