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년간 한국서 청소년·여성 도운
故 수지 여사의 동생 루시 인터뷰
2018년 10월 대구 중구 대봉동 갤러리신라에서 수산나(왼쪽) 여사와 여동생 루시 영거씨가 만났다. 영국에 사는 루시 영거씨가 언니를 보기 위해 찾아왔다. 수산나 여사는 6·25전쟁 이후 대구에서 전쟁고아, 미혼모 등을 돌보다 지난 9월 별세했다. 자매가 만난 건 이때가 마지막이었다. /대구 가톨릭푸름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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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언니는 1950년대 말 한국의 대구에서 길거리 고아들을 데려다 키우는 등 가난하고 불우한 이들을 도우며 삶의 대부분을 보냈다.’
지난 9월 영국 일간지 ‘가디언’에 ‘수지 영거 부음(Susie Younger obituary)’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런던에 사는 루시 영거씨가 대구에 사는 언니 수지의 별세 소식을 알리는 부고였다.
언니 수지는 1959년 대구로 건너와 65년간 전쟁고아와 미혼모, 가출 청소년 등을 돌본 인물이다. 본명은 수산나 메리 영거(Susannah Mary Younger). 한국 이름이 양수지다. 지난 9월 10일 88세로 별세했다. 대구 군위군에 있는 가톨릭군위묘원에 묻혔다.
여동생 영거씨는 이역만리 다른 나라에서 세상을 떠난 언니에 대해 “한국을 자기 집처럼 사랑했던 사람”이라며 “죽어서도 한국에 묻히길 원했다”고 했다.
수산나 여사는 1936년 영국 런던에서 3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노동당 국회의원이었다. 옥스퍼드대에서 철학·정치학·경제학을 전공했다. 이후 천주교 세례를 받았다.
그는 원래 천주교 선교 모임에서 만난 프랑스 출신 의사와 결혼하기로 했었다. 약혼식도 올렸다.
그의 운명을 바꾼 건 선교 모임에서 들은 한국인 강사의 특강이었다.
수산나 여사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조선 사람들은 선교사가 오기도 전에 스스로 신앙을 찾았고 온갖 박해에도 신앙을 지켰다고 했다”며 “그 얘기를 듣고 크게 감명받았다”고 했다. 수산나 여사의 외삼촌과 사촌오빠가 6·25전쟁에 참전했는데 그 때문에 한국에 대한 관심이 더 컸다고 한다.
수산나 여사는 천주교 대구대교구 주교였던 서정길 신부의 초청을 받아 1959년 12월 한국 땅을 밟았다.
그리고 약혼자와도 이별했다. 영거씨는 “대구의 신부가 언니에게 6·25전쟁 후 가난에 시달린 한국 사람들을 위해 봉사해 달라고 간청했다”며 “한국에서 봉사를 결심한 언니는 약혼자에게 사과 편지를 쓰고 약혼반지를 돌려줬다”고 했다. 이후 수산나 여사의 약혼자도 아프리카 카메룬으로 의료 봉사를 하러 떠났다고 한다.
영거씨는 “언니가 한국행 배를 타고 가던 중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했다”며 “‘결혼하지 말고 한국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라’는 얘기였다”고 했다. 이후 수산나 여사는 평생 대구의 전쟁고아, 가출 청소년 등을 가족처럼 여기며 홀로 살았다고 했다.
수산나 여사는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 불어과 교수로 초대받았다. 효성여대 음악과에 피아노가 없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영국에서 피아노 7대를 싣고 입국했다.
수산나 여사의 제자인 정진주씨는 “수지는 불어는커녕 영어도 서툴렀던 제자들에게 항상 ‘할 수 있다’며 용기를 줬다”고 했다. 덕분에 정씨도 경상대 불문학과 교수가 됐다.
1960년대 수산나 여사가 대구에서 돌봤던 구두닦이 소년들(왼쪽 사진). 오른쪽 사진은 수산나(가운데) 여사가 1962년 가톨릭여자기술원에서 미혼모, 가출 소녀 등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 /월간 ‘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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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일을 하던 수산나 여사는 구두 닦는 소년들을 본 뒤 전쟁고아나 가출 청소년을 돌보고 가르치는 봉사를 시작했다. 당시 대구에는 전쟁고아나 구두닦이 아이들이 넘쳐났다고 한다.
천주교 대구교구에 요청해 집 한 채를 마련했다. 영거씨는 “언니는 당시 런던에 살던 친구들에게도 기부를 요청했다”며 “그렇게 구두닦이 아이들에게 밥을 주고 공부를 시켰다”고 했다.
그 소문을 들은 당시 박경원 경북도지사가 “가출 소녀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사업을 해 달라”고 요청했다. 수산나 여사는 경북도가 빌려준 집에 ‘가톨릭여자기술학원’을 열고는 가출 소녀들에게 미용과 재봉 기술을 가르쳤다. 가톨릭여자기술원은 이후 가톨릭푸름터와 수지의집이 됐다.
현재 가톨릭푸름터에서는 미혼모 9명이 아이를 키우고 있다. 수지의집에는 가출 소녀 등 16명이 살고 있다. 지난 60여 년간 두 곳을 거쳐간 여성은 5000여 명. 강구희 수지의집 원장은 “수지 언니는 비록 우리 곁을 떠났지만 여성 복지를 위해 힘썼던 그 정신은 우리 가슴속에 여전히 남아 있다”고 했다.
수산나 여사는 1973~2004년 프랑스 루르드에 있는 ‘사도직 협조자 양성 센터’에서 통역 일을 했다. 거기서 한국인 천주교인들이 수업을 들을 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
2004년 은퇴한 뒤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가톨릭푸름터 고문이 됐고 2010년 한국 영주권을 얻었다.
영거씨에게 ‘수산나 여사가 왜 또 한국으로 돌아왔을까’ 물으니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언니에게는 한국이 자기 집이었으니까요. 정이 많이 들었다고 했어요. 애초 루르드에 간 것도 한국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였어요. ‘내 친정은 영국 런던, 시댁은 한국 대구, 직장은 프랑스 루르드’라고 했어요.”
수산나 여사는 대구 남구의 20평 아파트에서 여생을 보냈다. 수산나 여사의 친구인 최베로니카씨는 “수지는 손님들이 찾아오면 항상 한국 할머니처럼 ‘밥 먹고 가’라고 했었다”며 “직접 장을 본 재료로 파스타나 김치볶음밥을 만들어 내왔다”고 했다.
수산나 여사는 생전에 콩비지와 된장국, 미역국을 좋아했다고 한다. 여사가 살던 집 앞 마트 주인은 “늘 예쁘게 웃으며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셨는데…”라면서 아쉬워했다.
대구시는 2011년 수산나 여사에게 명예 대구 시민증을 수여했다. 법무부는 2020년 “평생 대구·경북 여성과 청소년의 자립을 돕는 등 지역사회에 기여했다”며 대통령 표창 ‘올해의 이민자상’을 수여했다.
이윤숙 가톨릭푸름터 원장은 “수지 언니는 평소 ‘원조받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로 거듭난 이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게 정말 자랑스럽다. 그게 내 행복’이라고 얘기했다”며 “’대한민국 사람들은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란 말도 자주 했다”고 전했다.
수산나 여사가 제일 자주 불렀던 노래는 아리랑이었다. 제자 정진주 교수는 “수지 선생님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도 아리랑을 불렀다”며 “한국의 문화와 예술, 무엇보다 한국인을 정말로 사랑했다”고 했다.
정진주 교수와 최베로니카씨 등이 그의 마지막을 지켰다. 소박한 그의 집에는 성경과 시집, 영국의 가족 사진이 남았다. 영거씨는 눈시울을 붉히며 “한국을 사랑했던 언니를 끝까지 보살펴 주고 받아준 한국의 모든 친구에게 감사 말을 전한다”고 했다.
[대구=이승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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