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서초사옥./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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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를 완성해야 하는 기한이 있는데, 주 52시간 제도 때문에 업무를 남겨두고 퇴근해야 하는 경우가 지난 몇 년간 많았습니다. 이 때문에 일부 핵심 직원들은 회사에 알리지 않고 소위 ‘미터기’ 꺼놓고 일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합니다.”
삼성전자 시스템LSI 사업부에서 근무하는 한 수석 엔지니어의 토로다. 삼성전자 시스템LSI 사업부 중에서도 애플, 퀄컴, 미디어텍 등 해외 글로벌 팹리스(반도체 설계 회사)를 경쟁사로 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AP) 개발팀의 경우 경쟁사보다 10~20배 이상 적은 인력으로 칩을 개발하고 있는 만큼 주어진 프로젝트를 완성하기가 어려운 환경에 놓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일각에선 경쟁사인 SK하이닉스는 삼성과 동일하게 주 52시간 제도를 지키면서도 승승장구하고 있는 만큼 삼성전자의 변명에 불과하다고 치부하는 시각도 있지만, SK하이닉스와 달리 삼성전자 사업 영역은 시스템 반도체 설계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까지 포괄한다. 해당 사업의 경우 메모리와 달리 고객사에 대한 맞춤형 수주 사업이며 글로벌 강자들을 추격해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더 많은 인력, 시간 투자가 필요하다.
◇ ”해외 고객사서 전화 빗발치는데, 담당자는 강제 퇴근”
11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정치권, 산업계 전반에 걸쳐 주 52시간 근로제의 실효성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고객사의 요청에 따라 적기에 칩을 공급해야 하고, 상황에 따라서는 빠르고 유연하게 설계·공정 변경이 필요한 칩 설계, 파운드리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삼성전자의 경우 글로벌 경쟁사들과 경쟁하기 위해 현재의 법 제도가 방해가 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인공지능(AI) 광풍과 함께 반도체 업계의 패러다임이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 가운데 삼성전자는 기존 정형화된 범용 메모리 반도체 중심의 구조에서 벗어나 새로운 태스크포스(TF)와 조직개편, 인력 재편 등을 통해 본원적인 경쟁력 회복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앞서 전영현 삼성전자 DS부문장(부회장)은 삼성전자의 위기 극복 방안으로 기술의 근원적 경쟁력 복원, 철저한 미래 준비, 조직문화와 일하는 방법의 혁신을 제시한 바 있다.
이 가운데 삼성 반도체 임직원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주 52시간 제도에 대한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단순히 ‘야근을 한다고 해서 기업 차원의 혁신이 가능하냐’며 비판적인 의견도 있지만, 책임·수석급 연구원들 중에서는 삼성전자가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의 목표인 초격차 전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주 52시간이라는 족쇄가 방해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현재 삼성전자 사내 취업규칙에 따르면 반도체 R&D 인력은 1개월 단위 탄력근로제를 적용받고 있다. 매주 52시간을 맞추지 않아도 한 달 평균으로 주 52시간 근무를 맞춰야 한다. 이를 어길 경우 인사팀에서 곧바로 사업부에 메시지를 전달해 해당 인력들의 근무를 강제적으로 중단시킨다. 이 때문에 고객사와의 납품 기일을 맞추고 원하는 성능, 수율을 맞추기 위해 불가피하게 회사 ‘몰래’ 근무하는 경우도 발생한다는 설명이다.
소품종 대량 양산 체제인 메모리 사업부와 달리 반도체 설계와 파운드리의 경우 숙련된 엔지니어들의 역량과 인력 규모가 핵심이다. 또 통상 1년이나 6개월을 주기로 새로운 스마트폰을 내놓는 스마트폰 제조업체에 칩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일정 기간 내에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끝내야 한다. 대만 TSMC를 경쟁사로 둔 파운드리 사업부 역시 사정은 다르지 않다. 파운드리 사업부의 경우 선단 공정 고객사가 몰려있는 미국, 유럽 등지의 테크 기업의 요청에 민첩하게 대응할 전문인력이 상시 필요하다.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 공장./삼성전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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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도체 산업과 주 52시간은 양립 가능한가
블룸버그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AI 반도체 시장을 주도하는 미국 엔비디아 직원들은 종종 새벽 1~2시까지 일하면서 주 7일 근무를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AI 칩 시장이 급격히 확대되면서 서버 고객사들의 주문이 폭주하고 있고, 특히 생성형 AI 도입 이후 업체들의 요구사항도 복잡다단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엔비디아, AMD 등 대표적인 AI 칩 설계업체의 칩 제조를 맞고 있는 TSMC 역시 마찬가지다. 대만 TSMC 연구개발팀은 하루 24시간 3교대를 통해 릴레이식으로 연구가 이어지도록 하는 시스템을 갖춘 것으로 알려졌다. 류더인 TSMC 전 회장은 지난해 6월 미국 애리조나 공장 직원들의 근로시간 불만과 관련해 “장시간 근무 준비가 되지 않은 이들은 반도체 산업에 종사하면 안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앞서 국민의힘이 반도체 특별법에 ‘화이트칼라 이그젬션(고연봉 관리·전문직 근로시간 규제 적용 제외)’ 조항을 담을 예정으로 알려졌다. 주 52시간 근로제를 완화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을 펼치는 기업의 족쇄를 풀어주자는 취지다. 최근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 위기와 맞물려 이 같은 정·재계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는 추세다.
황민규 기자(durchman@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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