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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 (금)

[김만권의 손길]긴 위기, 비상사태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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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싸움을 더 많이 하겠다”는
누구도 상상 못한 창조적 답변

지지율에 담긴 국민의 아우성
“전광판 안 보고 달리겠다” 외면

지난 7일 윤석열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 및 기자회견이 있었다. 대통령은 “모든 것은 저의 불찰이고, 부덕의 소치”이며 “국민 여러분께 죄송하다는 말씀, 진심 어린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로 시작해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사과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잘못한 게 있으면 딱 집어주시면 사과를 드리겠다”는 답변으로 끝났다. 이날의 사과를 대통령의 표현을 빌려 요약하자면, 이유는 정확히 모르지만 “어찌 됐든 사과한다”이다.

다음날 한국갤럽에서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대통령 국정 지지도는 17%였다. 일반적으로 이 정도의 지지율이면 대통령의 업무수행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전날 기자회견에서 “야구선수가 전광판 보고 운동하면 되겠나, 전광판 안 보고” 뛰겠다고 답변했다. 그런데 이게 적절한 비유일까?

국정 지지도와 관련된 여론조사에는 구체적으로 왜 대통령이 지지를 얻지 못하는지 구체적인 이유가 나온다. 대통령 지지율이 흔히 심리적 마지노선이라 보는 20%대에 이른 10월 4주부터 부정평가의 첫 번째 이유는 계속 ‘김건희 여사 문제’다.

그런데 기자회견에서 대통령은 그동안 문제가 되어왔던 김건희 여사의 공천개입 및 정무개입 논란에 대한 대책으로 ‘부부 싸움을 더 많이 하겠다’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창조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가장 공적인 사안을 가장 사적인 방식으로 해결하겠다고 말이다.

국정 지지도와 관련된 여론조사를 보면 국민이 체감할 때 대통령이 수행하는 역할 중 가장 미흡한 분야가 어디인지도 쉽사리 알 수 있다. ‘경제/민생/물가’와 ‘소통 미흡’이다. 갤럽을 기준으로 대통령 부정평가 이유에서 조사 시점에 상관없이 늘 꾸준히 세 손가락 안에 언급되는 요인이다. 국민이 무엇에 어려움을 겪고 있고, 무엇을 갈구하는지 알 수 있다.

이처럼 국민이 대통령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그래서 무엇을 더 해야 하고 무엇을 덜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게 대통령의 국정 지지도이다. 이렇게 보면 국정 지지도는 야구장의 전광판에선 확인할 수 없는, 선수가 지금까지 수행한 구체적 세부 기록지에 가깝다. 경기장에 들어서기 전부터 이 세부 기록을 통해 장단점을 파악하고 훈련하고 뛰어야 더 나은 선수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정기적으로 꾸준히 이루어지는 여론조사의 경우에는 국민의 평가뿐만 아니라 마음의 상태가 담겨 있다. 그것도 지역별로, 연령별로, 성별로, 정당별로, 직업별로, 생활수준별로, 정치성향별로, 정치에 대한 관심도에 따라 세부적으로 말이다. 국가의 지도자라면 당연히 참고해야만 하는 지표다.

정치에 ‘인테레그눔’(interregnum)이란 말이 있다. 우리말로는 ‘공위기’라 부르는데, 군주가 죽은 뒤 다음 군주가 주권을 물려받기까지 ‘권력의 공백 상태’를 이르던 용어다. 로마에서는 이런 공백 상태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이 시기엔 유스티치움(justitium)이라 부르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경계했다.

과거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경우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면 기존 대통령은 사실상 권력을 잃는다. 형식적 권력과 실질적 권력이 다른 상황에 놓이게 되며 소위 ‘레임덕’이 일어난다. 이런 권력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기존 대통령은 새로이 선출된 통치자가 권력을 인수하는 일을 돕고, 무엇보다 자신의 임기 후에 영향을 미칠 국가의 일을 독자적으로 결정하지 않는 게 관례다.

문제는 이런 공백기가 단순히 권력교체기에만 생기는 게 아니라는 데 있다. 무엇보다 대통령의 국정 지지도가 낮아지면 대통령의 업무수행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일단 공무원들이 복지부동이 된다. 국민이 지지하지 않는 대통령이 내린 지시를 책임지고 굳이 이행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차일피일 미루며 상황을 지켜보는 게 이들에겐 합리적 선택이다.

대통령이 받은 국정 지지도 17%는 바로 이런 권력의 공백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앞으로가 더 난감한 이유는 대통령이 이 지표를 외면하는 데 있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옥중수고>에서 “위기란, 낡은 것은 죽어가는데 새로운 것이 태어날 수 없다는 바로 그 사실에서 비롯된다. 이 인테레그눔에는 매우 다양한 병적 징후가 나타난다”고 썼다.

기자회견에서 윤 대통령은 “2027년 5월9일, 임기를 마치는 그날까지 일하겠다”고 공언했다. 기자회견에서 대통령이 보여준 것은 ‘희망이었을까? 아니면 병적 징후였을까?’ 만약 그게 병적 징후라면 2년6개월이라는 권력의 공백, ‘긴 위기, 비상사태가 시작되었다’.

경향신문

김만권 정치철학자


김만권 정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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