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인에 들려주는 지구인의 세계사
송재윤(맥마스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 |
◇문명과 야만의 변증법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전해진 '길가메시(Gilgamesh) 서사시'는 인류 최초의 본격적인 문예 작품이다. 기원전 2800년경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도시국가 우루크를 지배했다고 알려진 전설적인 국왕 길가메시의 번뇌와 깨달음을 그리고 있다. 아시리아(Assyria)어 설형문자(楔形文字, cuneiform)로 기록된 이 서사시는 1850년대 초에야 발굴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1916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가 번역본을 읽고서 감동에 휩싸여 "죽음의 공포에 관한 위대한 서사시"라 극찬했다 한다. 그 첫 장면은 문명과 야만의 경계를 넘나드는 두 남녀의 에로틱한 사랑에서 시작된다.
'길가메시 서사시'의 일부가 새겨진 진흙 태블릿. 이라크 박물관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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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적인 능력으로 도시국가 우루크의 국왕이 된 길가메시는 제멋대로 뭐든지 다 누리는 폭군이었다. 이에 고통받는 백성들은 신에게 불만을 호소하고, 신의 개입으로 길가메시는 매일 밤 꿈에서 초원에 버려져 들짐승처럼 살아가는 엔키두(Enkidu)를 보게 된다. 길가메시는 엔키두를 데려오라며 궁중의 기녀(妓女) 삼하트(Shamhat)를 초원으로 보낸다. 삼하트는 엔키두를 유혹하여 이레 밤낮 동안 성애를 나눈 후에 그에게 빵과 맥주를 주고 먹는 법을 가르친다. 삼하트는 엔키두의 맨몸을 깨끗이 씻겨 기름 발라 옷을 입혀주고는 그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신처럼 멋지고 잘생긴 엔키두여, 왜 짐승들과 어울려 살아가나요? 나와 함께 우루크로 가요! (하늘의 신) 아누(Anu)와 (사랑·전쟁·풍요의 신) 이슈타르(Ishtar)의 신전이 있는 그곳, 막강한 권력의 길가메시가 들소처럼 인간 위로 군림하는 그곳으로."
◇길가메시의 의문, "문명의 한계는 어디인가?"
삼하트에 이끌려 우루크로 간 엔키두는 길가메시와 힘을 겨뤄 패배하지만, 결국 두 사람은 절친한 친구가 되어 함께 이슈타르 신과 싸움을 벌인다. 이에 성난 이슈타르 신은 엔키두를 병들어 죽게 하고, 친구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길가메시는 불멸을 찾아 헤매지만, 필경에는 누구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태고의 작품이지만, '길가메시 서사시'는 오늘날 지구인들에게도 큰 울림을 준다. 무엇보다 이 작품 속엔 원시의 자연 상태에서 온전히 벗어나서 도시 문명 속에서 우쭐대며 살아가는 오만한 인간의 허영과 어리석음을 꼬집는 날카로운 풍자와 은유가 담겨 있다. 대체 누구일까? 거의 반만년 전 이 작품을 처음 머릿속에 떠올리고 섬세하게 운율의 언어로 구성했던 그 사람은?
야생의 짐승처럼 자유롭게 살아가던 엔키두는 궁중 기녀 삼하트의 유혹에 넘어갔고, 문명이 베푸는 안락과 쾌감에 빠져들었고, 교만한 길가메시와 손을 잡고 신에 도전하는 데에까지 이르렀다가 병마에 휩싸여 목숨을 잃고 말았다. 막강한 권력으로 만민 위에 군림하던 길가메시는 죽음의 공포에 휩싸였고, 불멸을 얻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인생의 유한함을 깨닫고 나서야 평정심을 찾았다. 줄거리만 보아도 문명의 숙명적 한계에 관한 심오한 반성이 담겨 있는 듯하다. 그 점에서 이 작품은 최고 권력자의 정신적 방황을 추적함으로써 인간의 숙명적 한계를 드러낸다. 당시 메소포타미아인들의 사유가 문명의 역리와 한계에 대한 철학적 반성에 이르렀음을 잘 보여준다.
◇문명의 탄생과 국가의 형성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본격적으로 탐구하기 전에 우선 문명에 관한 역사학의 일반론을 짚어보자.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고대 문명의 특징을 다음 여덟 가지로 꼽는다. 1) 도시의 출현, 2) 정부의 형성, 3) 식량 생산 이외의 전문직 종사자 증가, 4) 부유층의 형성과 신분적 분화, 5) 기념비적 구조물의 건축, 6) 문자사용과 기록 문화 형성, 7) 원거리 교역, 8) 과학 및 예술의 발전 등. 이 여덟 가지 특징을 단 한 문장으로 줄이면 문명이란 '상당히 넓은 지역에서 정부의 지배 아래 경제적으로 통합되고 정치적으로 조직되고 사회적으로 분화된 인간 공동체'라 할 수 있을 듯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정치적 조직화를 빼놓고선 문명을 의미 있게 설명하기 힘들다. 일단 정치적으로 국가 조직에 배속된 인간은 웬만해선 정부를 벗어날 수가 없다. 흡사 인위적 교배를 통해 가축화된 동물이 야생으로 회귀하기 힘든 이치와 다르지 않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화된 사회에 일단 편입되면 주민들은 합법적 공권력을 갖춘 정부의 감호 속에서 납세와 부역의 의무를 진다. 일단 그렇게 정치적 삶에 익숙해진 인간은 무정부의 자연 상태로 돌아갈 수가 없다. 그 점에서 문명화된 삶(civilized life)은 곧 정치적 삶(political life)이고, 정치적 인간은 자연 상태를 벗어난 인간이다.
문명의 제1보는 농업 생산성의 비약적 증가에 따른 인구 증가였다. 수렵채집인들이 농경과 목축으로 삶의 방식을 바꾸게 되면서 한곳에 정착해서 마을을 이루고 살아가게 되었다. 농사를 지으면 사냥할 때보다 일단 식량 생산량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상식적으로 식량 증산은 인구 증가로 이어진다.
어떤 사회든 먹거리가 늘어나면 영유아 사망률은 줄어들고 고령층 수명은 늘어난다. 그렇게 인구가 증가하면 당연히 더 많은 식량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가족마다 식구(食口), 곧 먹고사는 입이 늘어나면 어떻게든 식량을 늘려야만 한다. 농촌 마을에서 인구가 늘어나면 일단 사회의 총노동력이 증가하지만, 불의의 환경재앙으로 흉년이 지면 많은 사람이 굶주리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
하늘의 황소를 때려잡는 길가메시와 엔키두. 네오-아시리안 시대인 기원전 8세기~7세기 유물로 추정된다. |
전통 사회 농부의 가장 큰 특징은 부지런함이다. 꼭두새벽부터 농사일을 시작해서 해가 떨어지고 저물 때까지도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일을 한다. 농사는 그러나 혼자서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 농부 한 명 한 명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힘을 합쳐 공동 작업을 하지 않는다면 식량 생산을 늘릴 수가 없다. 농업생산력은 오직 효율적인 협동을 통해서만 제고될 수 있는 까닭이다. 쉽게 말해, 식량 증산은 인구 증가를 불러오고, 인구 증가는 더 많은 식량 생산을 요구한다. 식량 증산의 가장 효율적 방법은 사회적 총노동력의 합리적 사용이다.
사회적 협업이 없이는 농경이 유지될 수도, 개선될 수도 없다. 식량 생산을 늘리려면 공동으로 숲을 열어 농지를 개간하고, 물길을 끌어와 수량을 확보하고, 조직적인 협업으로 땅을 갈고, 씨뿌리고, 김매고, 추수하고, 탈곡해야만 한다. 아무리 소규모 공동체라 해도 사회적 협업을 이루기란 쉬울 리가 없다. 사회적 협업이 이뤄지기 위해선 구성원 모두를 만족시키는 공동의 프로젝트가 있어야만 하며, 많은 성원을 이끌고 갈 수 있는 지혜롭고 덕망 높은 리더가 필요하다. 어떤 사회에서든 좋은 리더의 지시에 따라서 구성원 모두가 한 방향으로 협력해야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구현될 수 있다.
바로 그 점에서 문명의 태동기에 폭군의 정신적 방황을 탐구한 '길가메시의 서사시'는 시대를 초월하는 제왕학(帝王學)이자 인간학의 교본이라 할 수도 있을 듯하다. 이제부터 길가메시의 이미지를 가슴에 품고서 메소포타미아 문명 속으로 들어가 보자.
송재윤(맥마스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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