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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5 (목)

숨막히는 악취…이에 저항하는 ‘퀴어’한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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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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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27일 오후, 서울 광화문에 있었다. “온·오프라인으로 200만여명이 함께했다”는 ‘10·27 연합예배’가 열렸던 날이다.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걷다가 청계천에서 기이한 모습을 보았다. “차별금지법 반대”, “동성애 합법화 반대”를 부르짖고 “남자가 여자 목욕탕에 들어가도 되는 법이 웬 말이냐” 같은 피켓을 든 사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다닥다닥 붙어 서서 손을 하늘로 치켜들고 통성기도를 하고 있었다.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고 있자니, 기도의 몸짓이 나치식 경례 같기도 했다.



사람이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며 신께 기도하는 모습이 그토록 흉할 수도 있다는 걸,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누군가의 존재를 지우려는 악심이 신앙의 외피를 뒤집어쓸 수 있다는 사실 역시 말이다. 그렇게도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저다지도 선연하게 이 땅 위에 지옥을 그대로 열어놓았다는 것도 놀라웠다. 그곳이야말로 내게는 지옥이었다.





화분 할머니에게도 오랜 파트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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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참 험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사랑이다. 러브 윈스 올(Love wins all), “사랑이 이긴다”고 하지 않았던가. 강유가람의 ‘럭키, 아파트’도 그런 이야기다. 사랑은 취약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여전히 오늘을 감사히 여기며 내일을 위해 꽃 한송이를 심는 건 증오라기보다는 사랑이라는, 그런 이야기.



선우(손수현)와 희서(박가영)는 9년을 함께해온 동성 커플이다. 얼마 전 두 사람은 이 대출, 저 대출, 이 영혼, 저 영혼 다 끌어다가 아파트를 한채 마련했다. ‘신혼살림’처럼 인테리어까지 싹 다 새로 하고 들어온 보금자리. 하지만 선우가 실직을 하면서 대출 이자를 떠안게 된 희서는 조금씩 예민해진다. 엎친 데 덮친다고, 생활비를 보태겠다며 배달 일을 하던 선우는 다리를 다쳐 깁스까지 하게 된 상황이다.



두 사람 사이에 냉각기가 지속되던 어느 날, 아파트에 이상한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집에서 가사를 돌보는 선우는 그 냄새가 어디에서 나는지 추적하고, 결국 아랫집에 살던 화분 할머니(전소현)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외신에서도 한국의 특수한 현상으로 소개했던 바로 그 ‘GODOKSA’(고독사)가 일어난 것이다. 아랫집에서는 사람이 죽었다지, 냄새는 빠질 줄 모르지, 대출 이자는 끝을 모르고 오르지… “아무래도 집을 잘못 샀다”는 생각이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든다.



문제는 할머니의 시신을 치우고도 냄새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관리사무실에고 경찰서에고, 아무리 문의를 해도 할머니의 재산을 처분할 직계가족과 연락이 닿지 않아 집 청소를 할 수 없다는 대답만 돌아온다. 선우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움직이고, 고독사 소문이 나면 집값이 떨어질까 신경이 쓰이는 다른 주민들은 “여자 둘이 사는 집”의 “이상한 여자”를 막으려 한다.



그리고 선우는 화분 할머니에게도 오랜 파트너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국 사회에서는 인정받을 수 없었던, 그래서 정식 가족이 될 수 없었던 여자 파트너가. 이제 선우에게 중요한 건 더 이상 냄새가 아니다. 닥쳐올 ‘나의 미래’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화분 할머니는 다양한 화분을 돌보는 이였기 때문에 ‘화분 할머니’라고 불렸다. 그는 동네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먹이는 사람이었고, 젊은 레즈비언 커플이 다정하게 손을 잡은 모습에서 자신의 청춘을 보던 이였다. 그런 그가 홀로 세상을 떠나 그의 냄새 분자가 온 아파트를 휘감을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워 썩어졌던 이유는 그의 사랑을 손가락질하고 ‘합법화’하지 않았던 한국 사회 때문이었다.





사회의 편견과 차별이 남긴 얼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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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분 할머니 집에 고여 있던 부패한 혈액과 체액, 그리고 악취는 그런 치사하고 부당한 사회의 편견과 차별이 남긴 얼룩이다. 젊은 레즈비언 커플에겐 이 얼룩을 지울 힘이 없다. 결국 할머니의 주검을 치운 건 공권력이었고, 할머니의 집을 청소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건 남겨진 “금반지”에나 관심 있을 남동생인 것이다. 이성애만 합법화해서 배타적으로 부양하는 사회에서 동성애자로 살아가기란 그 자체로 고난도의 태스크다.(그렇게 열심히 부양해주는데도 반토막 나는 결혼율과 제로로 수렴되는 출산율을 보면, 이성애란 얼마나 하찮은 ‘본능’인가?)



게다가 영혼까지 끌어다 마련한 집에는 나의 영혼이 머물지 않는다. 그 영혼은 은행에 저당 잡혔고, 아파트란 공간은 나의 정체성을 숨길 때에야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니까 말이다. 이 집단 거주지의 성격은 이성애 핵가족을 국가의 바탕으로 삼으려는 근대국민국가의 정책 기조 안에서 형성되었고, “젠더화되고 성애화된 규범과 관습의 영향”(캐스 브라운)을 받는다. ‘럭키, 아파트’는 견고한 이성애적 공간으로 그곳에 서 있다.



레즈비언 커플에게도 끊임없이 커버링, 즉 “주류에 부합하도록 남들이 선호하지 않는 정체성의 표현을 자제할 것”(겐지 요시노)이 요구된다. 동네 주민들은 “여자 둘이 사는 집” 여자들에게 동성애자인 것을 티내지 말고 “조용히 살면 누가 뭐라 그러냐”며 압박한다. 하지만 선우는 그럴 수 없다. 그냥 걸어만 다녀도 ‘레즈’라는 게 티가 날 뿐만 아니라, 딱히 그럴 마음도 없다. 희서는 좀 다른데,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똑똑한 딸이자 능력 있는 회사원으로서 커버링에 누구보다도 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두 사람 사이를 위협하고 있었던 또 다른 조건은 희서를 사로잡고 있는 커버링의 강박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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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클라이맥스, 희서가 스스로 그 커버를 벗었을 때, 두 사람은 다시 마주 보게 된다. 그리고 이성애를 고집하며 우뚝 서 있던 ‘럭키, 아파트’는 다소간 퀴어한 공간이 된다. 결국 공간이란 우리를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럭키, 아파트’는 숨 막히는 악취와 때때로 그에 저항하는 퀴어한 순간들을 절묘하게 포착했다.



2021년 7월 ‘한겨레S’에서 시작한 연재를 마무리한다. 짧지 않은 시간을 동행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당신과 나눈 영화에 대한 담소 덕분에 때때로 나의 ‘커버’를 벗어던질 수 있는 용기를 얻곤 했다. 이후로도 영화의 포스가 당신과 함께하기를.



영화평론가



‘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 저자. 개봉 영화 비평을 격주로 씁니다. 영화는 엔딩 자막이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됩니다. 관객들의 마음에서, 대화에서, 그리고 글을 통해서. 영화담은 그 시간들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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