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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6 (목)

"표현 절제할수록 관객 상상 여지 더 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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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이강소 '무제 - 91193'(1991).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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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 한 마리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차곡차곡 얇게 쌓아 올린 붓질은 선명한데, 정작 사슴의 눈은 그려져 있지 않다. 형태도 온전하지 않고 엉성하다. 언젠가 꿈속에서 본 사슴 같기도 하고, 현실에 존재하는 사슴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강소 화백의 '무제-91193'(1991)다. 완성된 작품이지만 이 화백은 "제 나름대로 사슴을 그리면서 좀 덜 그렸다"고 했다. 그의 거친 필치에는 그림을 보는 사람에 따라, 보는 순간에 따라 작품이 관객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면서 계속 살아 숨쉬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이강소 화백의 작품 세계를 총망라한 특별전 '이강소: 風來水面時 풍래수면시'가 내년 4월 13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개최된다. 1970년대 실험미술로 신체제,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 등 현대미술운동을 주도했던 이 화백의 초기작부터 근작까지 전부 아우르는 첫 서베이전이다. 회화와 조각, 설치, 판화, 영상, 퍼포먼스 사진 등 100여 점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이수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어떻게 현대미술을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나가는 작가의 끊임없는 실험 과정을 엿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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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명의 '풍래수면시(風來水面時)'는 '바람이 물을 스칠 때'라는 뜻으로 새로운 세계와 마주침으로써 깨달음을 얻은 의식의 상태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송나라 성리학자 소옹(邵雍·1011~1077)의 시 '청야음(淸夜吟)'에서 따온 것이다. 이 화백은 왼쪽 얼굴에 붙인 반창고를 보이며 "얼마 전 꿈에서 너무 생생하게 황소가 얼굴을 들이받아 놀라며 깨어났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침대에서 떨어져 방바닥에 얼굴을 부딪힌 상태였다"며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는 여기도 역시나 꿈과 다르지 않은 또 다른 차원의 세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밝혔다.

지난 50여 년간 이 화백이 현대미술을 실현하기 위해 매진해온 것은 '작가 지우기'였다. 일찍이 그는 창작자로서 작가의 역할과 한계를 느끼고, 현실 세계와 그 현실을 재현한 이미지에 대한 인식에 끊임없이 의문을 던졌다. 비디오 작품 '페인팅 78-1'(1978)과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 공개된 누드 퍼포먼스 사진 '페인팅(이벤트 77-2)'이 대표적이다. 작품 안에서 그는 자신 앞에 놓인 유리를 물감으로 칠하는(그림 그리는) 행위를 통해 작가 본인을 지우는가 하면, 반대로 몸에 묻은 물감을 지워내는 과정에서 회화 작품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여준다.

1975년 살아 있는 닭을 활용해 선보인 퍼포먼스 장면들을 담은 사진 '무제-75031'(2016)에서도 작가는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당시 이 화백은 운동장 중앙에 물감을 두고 사슬로 묶어둔 닭이 그 물감을 밟고 돌아다니면서 찍은 발자국들이 하나의 회화가 되는 과정을 선보였다. 회화 대작인 '섬에서-03037'(2003) 역시 200×360㎝ 크기의 대형 캔버스 화면에서 눈에 띄는 것은 굵직한 선 3개가 전부다.

이 화백은 "완전히 표현을 안 할 순 없겠지만 최대한 표현을 아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관객은 자연스럽게 자기 경험을 떠올리고 상상을 하면서 작품을 보게 된다"며 "그것이 근대미술과 현대미술의 차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작가가 그린 것을 그대로 관객이 믿도록 일종의 강요를 하는 것이 근대미술이었다면, 현대미술은 관객이 작품을 능동적으로 보면서 비로소 작품이 완성된다는 설명이다. 작품이 구상도, 추상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이유다.

1973년 명동화랑에서 열린 첫 개인전에서 선보였던 퍼포먼스 작품 '소멸-화랑 내 선술집'(1973)은 미술관의 두 개 층을 아우르는 로비 성격의 전시 공간인 '서울박스'에 재현됐다. 입간판에 낙지볶음, 조개탕, 돼지갈비 등 메뉴 이름이 붓글씨로 적혀 있는 옛 선술집의 풍경을 작품화한 것으로, 이곳을 오가는 사람들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면 작품이 완성된다. 공간 구획을 나누는 낡은 옛 기둥에 새 대들보를 끼운 것은 옛것을 재현하면서도 현대미술의 동시대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송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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