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0.22 (화)

[자작나무 숲] 침묵이 말한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조선일보

일러스트=이철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여럿이 수다 떨다 대화가 끊겨 어색해지면, 러시아인은 ‘고요 천사 날아갔다’고 한다. 가령 체호프 드라마 속 등장인물이 썰렁한 얘기를 던져 좌중 모두 말을 멈췄을 때, 잠시 후 누군가 “고요 천사 날아갔군” 하는 식이다. 그렇게 해서 다시 대화의 숨통이 트인다. 이때 침묵은 소통을 향한 징검다리다.

19세기 시인 튜체프가 ‘침묵(Silentium)’이란 유명한 시에서 “말해진 생각은 거짓”이라고 썼다. 말해진 생각은 거짓이라는 그 생각을 또 말할 수밖에 없는 자가당착이 좀 우습긴 하나, 이 철학적 시인은 설명한다. “마음이 어찌 말을 하겠는가?/ 남이 나를 어찌 이해하겠는가?/ 내가 왜 사는지 남이 어찌 알겠는가?” 언어는 무력하기 그지없다. ‘말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표현이 태어난 배경일 테다.

마음과 생각의 전달체로서 언어가 무력한 이유는 우선 틀 밖의 무형·무한 세계를 언어라는 틀 안에 가두려 하기 때문이다. 그건 본질적으로 무모한 일이어서, 아무리 말해도 명쾌하지 않고 오히려 본뜻에서 멀어지는 느낌만 든다. 속 시원하기는커녕 점점 더 답답해진다. 말을 끊지 못하고 계속한다는 것은 적확한 ‘그 말’을 아직 못 찾았거나, 스스로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모르거나, 또는 다른 할 일이 없다는 뜻이다.

러시아인의 말은 많고도 무겁다. 저 길고 장황한 벽돌 책들을 떠올려보라. 그냥 잡설이 아니라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담론으로 가득하다. 러시아인은 원래 사변가라고 단언한 철학자 베르댜예프도 있다. 도스토옙스키가 기나긴 소설 ‘카라마조프 형제들’에서 통찰하기를, 지금껏 만난 적 없고 앞으로도 다시 볼 일 없을 러시아 청년 둘이 술집에서 만났다 하면 ‘신은 존재하는가. 불멸은 존재하는가?’ 같은 우주적 질문을 논한다는 것이다. 스스로가 그런 유의 논쟁가였던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적 다변 기질에 대해 자기 냉소의 일침을 놓기도 했다. “이렇게 말만 너무 많이 하니까,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아무 일도 하지 못하니까 지껄이기만 하는 거다.”(죄와 벌)

톨스토이는 언술(言述) 행위를 불신했다. 말하는 사람은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려는 경향이 있어서 때로는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때로는 의도했던 것과 전혀 다른 딴소리를 내뱉기도 한다. 그러므로 온전한 진실의 언술은 원래부터 있을 수 없다. 톨스토이 소설에서 말 번지르르한 인물은 한결같이 교활하거나 엉터리로 나온다. 당연히 참된 인물은 과묵하고, 말로써 소통하려 들지 않는다. 그런 사람의 이상적인 언어가 침묵이다.

러시아 문학에서 말수 적은 작가는 뭐니 뭐니 해도 체호프일 것이다. 간결함이야말로 체호프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의 산문은 짧고, 희곡에는 말 멈춤과 말 줄임이 잦다. 중간중간 ‘사이(pause)’라는 지문이 나오는데(’세 자매’에는 무려 쉰일곱 번), 이때는 최소 3초 멈춰 있어야 한다. 자동차 운행 중 마주치는 우선 멈춤 표지판 같다. 청산유수의 말 홍수에 익숙한 배우, 연출가, 관객에게는 결코 자연스럽지 못한 이 공백 상태를 체호프는 애용했다. 중간에 뚝뚝 끊겨버리는 동문서답식 대화는 일상에서도 자주 만나지만, 체호프의 ‘사이’는 하던 말을 멈춘 채 잠시 기다리라는 지시문이다. 3초간의 의식적 침묵을 가리킨다.

일상 대화에서 사람들은 말을 계속하려고 하지 멈추려고는 하지 않는 편이다. 대화가 끊기는 어색함을 피하려고 억지로라도 말을 잇고, 침묵이 불안해서 계속 말하고, 듣는 수고를 덜기 위해 끊임없이 말한다. 자기 말만 쏟아내며 남의 말에는 통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말은 소통하는 말이 아니다. 자기 말만 하는 사람은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할뿐더러, 그 자신도 상대에게 이해받지 못한다. 듣는 쪽에서 일찍이 귀를 닫아버렸기 때문이다. 말은 실컷 많이 한다고 하여 이해를 더 도모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체호프의 ‘사이’는 생각 없는 말 흐름의 고삐를 당겨 잠시 생각하게 해주는, 일종의 언어적 범퍼(과속방지턱)에 해당한다.

침묵은 무겁고 단단한 말이다. 무력한 말, 의미 없는 말, 기만하는 말을 누르며 웅변한다. 말 안 하느니만 못해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더 잘 말하기 위해 침묵하는 것이다. 부럽게도, 내가 봐 온 진짜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사람은 모두 과묵하다. 노벨 문학상 수상 선정 후 한강 작가의 첫 반응 역시 말이 아니라 침묵이었다. 평소 그녀의 시적인 문장을 좋아했지만, 이번에 그녀가 체현해 준 그 말 없는 ‘사이’가 내게는 가장 맘에 들었다.

△매일 조선일보에 실린 칼럼 5개가 담긴 뉴스레터를 받아보세요. 세상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91170

[김진영 연세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