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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 (토)

[만물상] 확 달라진 저녁 식당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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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일러스트=박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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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 기업에 입사한 대학 동기들과 만나면 너나 없이 저녁 회식과 야근의 고충을 토로했다. 매일같이 회식했고 그 후엔 퇴근하지 못하고 사무실로 돌아갔다. 근처의 식당과 주점들도 직장인 업무 사이클에 맞춰 밤 늦도록 영업했다. TV에선 야근 마치고 자정까지 술 마신 뒤 퇴근하는 이들을 위한 숙취 해소 음료 광고가 나왔다.

▶‘다른 저녁’도 있다는 사실을 유럽에 출장 가서 처음 알았다. 퇴근 후 곧장 귀가해 가족과 저녁 식사를 하는 그들의 모습은 낯설었다. 오후 6~7시면 서울은 초저녁인데 유럽 도시들은 일부 유흥가 외엔 적막강산으로 변했다. 우리나라 생각하고 늦게 나갔다가 문 연 식당을 찾지 못해 저녁을 굶은 적도 있다.

▶어느덧 우리 삶도 그렇게 바뀌고 있다. 한 카드사가 서울 광화문·강남·여의도·구로·경기도 판교 등 5곳 직장인들의 교통카드 이용 시간대를 분석했더니 퇴근 시간이 5년 전보다 평균 19분 앞당겨진 것으로 조사됐다. 오후 6~7시대가 43%로 여전히 가장 많았지만, 7시 이후 퇴근이 5년 전보다 줄었고 오후 5~6시 퇴근이 13%에서 23%로 크게 늘었다. 퇴근 후 어디서 카드를 쓰는지도 봤다. 식당과 주점에 덜 가고, 대신 헬스장 사용이 늘었다. 저녁의 삶이 선진국형으로 바뀌고 있다는 의미다.

▶서울 광화문에서 음식점을 하던 지인이 최근 가게 문을 닫았다. 2차 손님을 받아 술을 팔아야 하는데 다들 1차만 하고 귀가해 이익이 안 남는다고 했다. 직장인 사이에 밤 9시가 회식 마감 시간으로 굳어지면서 이후엔 영업할수록 손해 나는 ‘적자 타임’이라고 했다. 자정까지 술 마시다가 ‘지금은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이란 노래 듣고 일어서던 게 옛날 일이 됐다. 이젠 밤 8시에 종업원이 다가와 “라스트 오더(마지막 주문) 하라”고 한다. 밤 9시쯤 식당 내부엔 손님이 없다시피 하다. 과거 이 시각 식당은 시끌벅적했다. 인건비와 재료비의 상승, 코로나 이후 고착된 회식 자제 분위기, 맞벌이 증가 등이 ‘한국인의 저녁’에 근본적인 변화를 부르고 있다.

▶한국인의 근로시간은 2011년까지만 해도 OECD 회원 23국 중 최장이었다. 하지만 2022년엔 5위가 됐다. 장시간 노동을 개선해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은 긍정적이다. 그러나 우리를 추월해가는 중국은 과업이 주어지면 완수할 때까지 며칠이고 밤샘을 불사한다는 뉴스도 접한다. 그렇다면 적게 일하고 많이 버는 고부가가치 산업구조로 가야 하는데 우리가 그 길로 가고 있는지 걱정스러운 생각도 든다.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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