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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8 (금)

[세상사는 이야기] 오리배를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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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꼭 이맘때의 일이었다. 친구가 전화를 해서는 불쑥 오리배를 타러 가자고 말했다. 오리배? 내가 묻자 친구는 잠시 뜸을 들이다 답했다. 지금 오리배를 타지 않으면 돌아버릴 것 같아. 친구는 좀처럼 쓰지 않던 연차를 썼다고, 벌써 전철역 승강장에 서 있다고 했다. 천천히 준비하고 나오라는 친구의 말 뒤로 열차 도착 알림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친구는 직장을 막 옮긴 참이었다. 이전에 일했던 곳은 견고한 시스템을 갖춘 업장이었으나 위계가 지나치게 분명하고 학벌을 따졌다. 새로운 곳은 분위기가 자유로운 대신 업무 분장이 확실치 않았다. 특별히 사이좋은 사람과 특별할 것도 없이 사이 나쁜 사람이 하나씩 있다고, 전자와는 결혼을 하고 싶고 후자와는 머리채를 잡고 싸우고 싶다고 친구는 말했다. 마음이 오락가락하겠구나 싶긴 했지만 난데없이 오리배라니. 한강도 배도 전부 싫어하는 나는 말 한마디 얹지 못한 채 오리배 선착장까지 가고 말았다.

평일 오전의 선착장은 텅 비어 있었다. 친구는 수동 오리배를 고른 뒤 구명조끼를 꼼꼼히 챙겨 입었다. 승선할 때 깊숙이 기울어지는 오리배 때문에 나는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바람이 제법 불어 수면이 거칠었다. "어떤 사람이 나를 미워하면 나도 같이 미워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단 말이야." 친구가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근데 그 사람을 미워하려면 그만큼의 에너지를 써야 돼. 나는 온종일 그 사람을 신경 쓰고 그 사람만 지켜보고 그 사람 말을 곱씹어. 단지 미워하기 위해서 그만큼의 노력을 해. 너 그거 알아? 그렇게 미워하는 동안 자꾸만." 친구가 한참 말을 고르다 발을 멈췄다. 이미 사방이 물이었다. "내가 그 사람을 닮아가."

딱히 위로할 말이 없어 나는 발을 굴렀다. 그런데 웬걸, 오리배가 기우뚱대기만 할 뿐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질 않았다. 뻥 뚫린 사방으로 이리저리 바람이 들이치기 시작했다. 오리배가 움직일 때마다 주위에서 물이 넘칠 것처럼 찰랑거렸다. 급기야 오리배는 정면으로 바람을 맞고 뒤로 밀려가기 시작했다. 강 복판에 있던 금지선과 부표까지 우리는 순식간에 떠밀려 갔다. 그제야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친구가 같이 페달을 돌리기 시작했다. 친구는 설마, 하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가을태풍이 어쩌고 하는 기사를 엊그제 본 것 같은데. 뉴스를 찾아보니 정말이었다. 남단을 스칠 뿐이지만 강풍과 호우를 조심하라는 내용이 태반이었다. 우리는 필사적으로 발을 굴렀다.

그래서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거 아냐? 이런 날은 당연히 영업을 안 했어야지. 나의 원망은 오리배 직원에게 향했다. 그러고 보니 시간 신경 쓰지 말고 재미있게 놀고 오시라던 말도 수상쩍었다. 표정이 좀 익살맞지 않았어? 저기서 우리가 버둥대는 걸 구경하고 있을지도 몰라. 친구는 이를 꽉 물고 페달 밟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마음의 다급함과 달리 오리배는 몹시 더디게 움직여 선착장으로 돌아갔다. 땅에 발을 디딜 수 있게 되었을 때쯤엔 등과 엉덩이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직원이 달려와 오리배를 고정시키며 물었다. "왜 벌써 그만 타세요? 날씨도 좋은데." 날씨? 날씨가 좋다고? 나는 직원에게 한 소리 쏟아부을 작정으로 뒤로 홱 돌아 강을 손가락질했다. 수면이 잔잔했다. 방금 전까지의 바람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일렁이는 물결 위로 햇빛이 찬란하게 부서지고 있었다.

친구와 나는 전철역까지 말없이 걸었다. 종아리와 허벅지가 걸을 때마다 저릿저릿했다. "별것도 아니네." 친구가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한강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깐 그렇게 무서웠는데, 지나고 보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방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한낮이었다.

[안보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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