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0.19 (토)

한강 문학은 통치술에 대한 감각적 불복종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한국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가 17일 서울 강남구 아이파크타워에서 열린 제18회 포니정 혁신상 시상식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소설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기념해 한국 문학 전문가들이 이번 수상의 의미를 짚고 이를 계기로 한국 문학의 나아갈 바를 진단하는 연쇄 특별기고를 싣는다.





한겨레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강 문학은 폭력의 작동과 효과의 내피를 파고든다. 개인적이면서 지극히 정치적인 서사다. 폭력 자체가 직접적이고 주관적이면서 상징적이고 체계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한강 작품은 타자의 다름과 낯섦에 대한 물리적 폭력이나 그것을 사용하고 이용하는 도구적 폭력에만 집중하지 않는다. 그보다 그의 작품은 폭력의 작동 방식과 효과에 더 깊이 접근한다.



폭력은 가장 직접적이고 주관적인 경우조차 복종에 대한 명령이고 불복종에 대한 징벌이다. ‘폭력=인간 본성’이라는 널리 유포된 등식은 폭력에 대한 인준에 앞서 ‘폭력은 선악의 저편’이라는 담론을 확산시킨다. 이 담론에서도 폭력은 악으로 묘사되지만 언젠가 극복될 과정으로서 악일 뿐이다. 야만에서 문명으로, 신화에서 계몽으로의 발전 논리에는 이렇게 폭력의 정당화가 숨어있다. 한강 문학은 이들에 의해 이런 방식으로, 이런 목적을 위해 행사되는 폭력의 작동 방식, 곧 통치술에 대한 감각적 불복종이다.



고통은 폭력의 직접적 효과다. 굴복과 체념의 내면화는 심층적 효과다. 고통, 굴복, 체념으로 이어지는 폭력의 최종 효과는 무감각(nonsense)이라는 괴물의 난립이다. 무감각은 폭력의 최종 효과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폭력을 저지르고 널리 퍼뜨리는 사악한 힘이다. 한강 작품은 이 무감각이라는 괴물과의 끝없는 싸움이다.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소년이 온다’)



무사유가 ‘생각 없음’이 아니듯 무감각도 ‘감각 없음’이 아니다. 무사유와 무감각은 소극적인 무기력증이기보다 적극적인 무시의 활동이다. 무사유와 무감각은 생각과 감각을 적으로 적시하고 파괴한다. 폭력은 망각 속에 감금시키고, 고통은 마취제로 은폐시킨다. 무사유와 무감각의 시대가 곧 폭력의 시대다. 특히 무감각에서 자양분을 제공받은 폭력은 잔인하고 가혹하다.



‘지금, 여기’. 무감각이 부르는 승리의 노래만이 점점 더 크게 울려 퍼지고 있다. 니체가 신의 죽음을 선포한 이후 인간은 참으로 인간적인 사회, 각자가 자신의 꿈을 마음껏 펼치는 세계를 꿈꾸었다. 천륜이 무너져도 인륜이 바로 서면 된다고 생각했다. 신의 부름이 사라져도 역사의 부름에 응답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니체가 죽은 뒤 100년도 되지 않아 푸코는 인간의 죽음을 선언한다. 인간의 본질이 깨졌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가능성도 조건도 사라졌다. 탈신성, 탈인륜의 벼랑 끝에선 ‘나’를 ‘나’이게 해주는 모든 가치와 의미가 사라졌다. 심지어 삶이 죽음보다 더 좋다는 가치조차 위협받고 있다. 무의미의 시대, 그야말로 순수한 무(無)의 시대다.



‘지금, 여기’. 무사유, 무감각, 무의미의 시대와 장소, 순수를 강요하는 시대와 장소의 딸과 아들로서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변명도 할 수 없다. 어떤 존재도 나와 너에게 그 가치를 따르라고 하지 않았다. 어떤 본질도 나와 너에게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나와 너가 무에서 순수하게 생각하고 감각한 것이다. 무, 순수한 무는 순수한 자유다(사르트르). 그러니 나와 너의 생각과 감각, 그리고 무사유와 무감각도 나와 너의 자유이고 나와 너의 책임이다.



한강의 문학은 ‘지금, 여기’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니체에 따르면 “예술은 종교가 몰락한 곳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니체는 어딘가 낡았다. 종교만이 아니라 역사와 도덕, 심지어 감각조차 무너진 곳에서 삶과 세계는 예술을 통해서만 가까스로 정당화될 수 있다. 한강 작품이 어렵다고 한다. 힘들다고 한다. 그래설까? 그래서다. 한강 작품에선 벌거벗은 의식, 벌거벗은 몸이 겪어야 하는 폭력과 저항의 날 이미지가 펼쳐진다. 날 이미지가 꾸미는 이야기 속에는 출구도 출구를 향한 등불도 보이지 않는다. 이념의 지도도 역사의 부름도 없다. 타인의 고통을 날 것인 채로 받아들이는 작가의 몸, 타자가 된 몸의 감각이 이야기의 시작이고 끝이다. 그렇다. ‘지금, 여기’. 순수한 무의 시대에 몸으로 고통받은 예술가, 감각적으로 상처받은 예술만이 우리를 위로할 수 있다.



추하다고 한다. 재미가 없다고 한다. 그렇다. 한강 작품은 아주 쓰고 때로 추한 예술이다. 부드러운 식감을 위해 개를 오토바이에 묶어 죽을 때까지 끌고 다니는 사람들, 육식을 거부하는 딸의 입을 벌려 고기를 쑤셔 넣는 아버지, 온몸에 화려한 꽃을 그리고 처제와 동물적 성행위를 하는 예술가, 성기를 꺼내 탁자에 올려놓게 하고 나무 자로 내려치겠다고 위협하는 사람들, 총에 맞고, 몽둥이에 맞고, 칼에 베여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저 듣는 것조차 힘들다. 예술에서 삶을 긍정하고 즐거움을 찾고 싶은 사람들,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상실한 사람들에겐 다가가기 힘들 수 있다. 하지만 설탕이 폭탄만큼 위험한 시대에 달콤한 후식 같은 작품은 예술이 아니라 상품이다. 더구나 순수의 시대에 순수한 서정은 폭력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인준이다. 폭력과 싸우기 위해서 예술은 폭력의 효과인 고통을 자기 안으로 끌어들일 수밖에 없다.



예술 형식에서 한강의 작품은 이질적이고 심지어 적대적인 요소들을 다층적으로 연결하는 ‘시적 산문’의 혁신으로 평가받는다. 산문이 시와 닮았다고들 한다. 시처럼 아름답다고 한다. 그러나 한강 작품은 순수해서, 리듬이 아름다워서 ‘시적’인 것이 아니다. 그에게 ‘시적’은 음악적 리듬이고, 이 리듬은 고통받는 타자에 대한 신체적이고 유기체적인 미메시스에서 생겨난다. 감각적이지만 동시에 어떤 장식도 허용하지 않은 절제가 ‘시적’이다. 절제된 감각은 따뜻하기보다 차갑고 싸늘하다. 고통받는 신체가 써 내려 간 시이기 때문이다.



미학의 관점에서 한강 작품이 이룬 가장 큰 성취는 청각적이고 시각적이면서 동시에 후각적이고 촉각적인 이미지를 함께 생산하는 다층적 구성이다. 청각적 이미지는 고통받는 신체의 리듬이고 박자다. 시각과 후각, 그리고 촉각적 이미지는 구조와 주체, 플롯과 주제의 관계를 비춘다. 한강 작품의 구조와 플롯은 시각과 후각의 이미지를 통해 계속해서 미끄러지며 차이의 향연을 펼친다.



반면 주제와 주체는 끝없는 분열과 변화 속에서 예민하면서 동시에 단단한 감수성(sensibility)을 이어가는 촉각 이미지를 산출한다. 이 맥락에서 한강 작품의 깊이는 시대의 배열보다 장소의 배치에 관심을 기울여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이 경우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다른 시대가 아니라 다른 장소의 이야기이다. 각기 다른 장소에서, 정상적으로 통치가 이루어지는 장소에서, 무엇보다 정상적으로 통치되기 때문에 점점 더 커지지만 점점 더 보이지 않는 폭력에 저항하는 이야기이다. 아무나 느낄 수 없고, 아무나 느끼려고 하지 않는 이야기, 그 이야기를 세계가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 이것은 기적이다.



한겨레

박구용 | 전남대 철학과 교수



▶▶권력에 타협하지 않는 언론, 한겨레 [후원하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

▶▶행운을 높이는 오늘의 운세, 타로, 메뉴 추천 [확인하기]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