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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 (토)

이슈 하마스·이스라엘 무력충돌

신와르, ‘무력 통한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 내세운 과격·강경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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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예 등 온건파와 대립각 세워 와

가자에 ‘죽음과 파괴’ 초래한 장본인

조선일보

17일 사망한 것이 확인된 하마스의 정치지도자 야히야 신와르.


가자 지구에서 16일 이스라엘 군의 공격으로 사망한 야히아 신와르는 지난해 10월 7일 하마스의 이스라엘 습격을 기획하고 주도한 인물이다. 이스라엘은 하마스와 전쟁 발발 이후 공개적으로 그를 “10월 7일 학살의 주범”이라고 선언하고 다른 하마스 주요 지도자 중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할 인물로 꼽았다. 요아브 갈란트 이스라엘 국방장관이 “신와르의 제거는 이번 전쟁의 주요 목표 중 하나”라고 했을 정도다.

전쟁 발발 이후 신와르는 이스라엘군과 신베트(이스라엘의 국내 정보기관)의 집요한 추적을 피해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가자 지구의 땅굴을 전전하며 지냈다. 그 와중에 주변의 하마스 지도자 및 군 지휘관들이 연이어 이스라엘의 공격에 사망했고, 결국 지난 7월 31일 정치 지도자 이스마일 하니예마저 폭탄 공격으로 사망했다. 신와르는 이후 하니예의 자리를 물려받아 가자 지구 지도자 겸 하마스의 정치 지도자가 되면서 사실상 하마스의 제 1인자가 됐다.

그는 1962년 가자 지구 남부 칸유니스의 난민촌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가자 이슬람 대학교에서 아랍어를 전공하고 졸업 직후인 1980년대 초반 하마스에 가담했다. 그는 “팔레스타인 땅에서 이스라엘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이슬람 국가를 세우겠다”는 급진 이슬람주의 이념에 경도된 인물이었다. 하마스의 정보·보안부서를 이끌면서 조직내 이스라엘 협력자를 색출해서 처형하는데 앞장서 ‘칸 유니스의 도살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후 마지막 순간까지 하마스내 과격·강경파의 리더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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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0월10일 마지막으로 찍힌 하마스 지도자 아히야 신와르의 뒷모습. 이스라엘에 대한 기습 테러 3일 뒤에, 가자 지구의 한 터널에서 가족들과 함께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있는 모습이 하마스의 터널 CCTV 카메라에 찍혔다./이스라엘방위군(I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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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기 삶의 3분의 1을 이스라엘 감옥에서 보냈다. 12명의 팔레스타인과 2명의 이스라엘 군인을 잔인하게 살해한 혐의로 1988년 이스라엘 당국에 체포돼 법정에서 종신형을 선고 받고 22년을 복역했다. 신와르는 이 과정에서 히브리어와 유대 문화 및 사회를 공부했다. 또 팔레스타인인 죄수들을 선동·결집해 수감 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다 2011년 다른 수감자 1000명과 함께 석방됐다. 2006년 하마스의 습격으로 인질이 된 이스라엘 군인 길라드 샬리트와 교환하는 조건이었다.

하마스로 돌아온 신와르는 한 달 만에 첫번째 아내 아부 자마르와 결혼하고, 하마스의 군사 조직 책임자가 됐다. 2012년부터는 이란혁명수비대(IRGC) 정예 쿠드스군 사령관이었던 가셈 솔레이마니를 만나며 이란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신와르는 이때 이란의 도움을 얻어 하마스의 전략과 군사 조직을 설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하니예가 2017년 정치 지도자(정치국장)가 되자, 그의 뒤를 이어 가자 지구 지도자가 됐다.

타임스오브이스라엘은 “신와르는 가자지구를 이스라엘을 파괴하기 위한 작전 기지로 만들려고 했다”고 평했다. 이를 위해 막대한 인력과 자금을 투입해 대규모 땅굴망과 무기 저장고, 로켓 발사대 망을 구축했다. 이를 지켜보던 이스라엘은 2021년 신와르가 가자 지구 지도자에 연임하자 칸 유니스의 그의 자택을 공습, 암살 시도를 했다. 그는 이후 여러 차례 공개 행보를 보이며 건재를 과시했다.

신와르는 이미 이때부터 하마스의 무장 조직 알카삼 여단의 사령관 무함마드 데이프 등과 함께 이스라엘을 기습하는 공격 작전을 기획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마스가 정치 조직으로서 정당성을 확보하려면 무장투쟁도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의 온건파의 반대가 있었지만, 신와르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암살당한 하니예 등 온건 성향의 하마스 지도부에 대해 ‘호텔 사람들’이라고 비하하며 적대감마저 드러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이 카타르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것을 비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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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브 갈란트 이스라엘 국방장관이 기자회견에서 스크린에 가자의 하마스 지도자 신와르의 얼굴을 띄워놓고 "그의 제거가 이번 전쟁의 주요 목표"라고 말하고 있다./이스라엘 TV 채널 12 스크린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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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신와르의 주도로 실행에 옮겨진 지난해 10월 7일의 ‘알아크사 홍수 작전’은 이스라엘과 전면전을 불렀고, 수만 명의 팔레스타인이 죽고 가자 지구가 폐허가 되는 결과를 낳았다. 또 하마스의 동맹 헤즈볼라마저 궤멸 상태로 몰아 넣었다.

신와르는 그러나 동포들의 고통과 죽음 앞에서도 ‘팔레스타인 해방’의 이념을 앞세운 냉혈한이었다. 그를 직접 만났던 팔레스타인과 중동 관리들은 “신와르는 1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도 지난해 10월 7일 공격에 대해 뉘우치지 않고 있다”며 “그는 여전히 ‘무장 투쟁만이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고 있었다”고 전했다. 민간인들을 인간 방패로 내세우는 전술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가자 지구에 죽음과 굶주림이 만연하면서 가자 주민들 사이에 신와르에 대한 반발 조짐이 나타나기도 했다. 하지만 하마스 조직에 대한 신와르의 장악력은 여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이스라엘의 암살 위험을 피해 끊임없이 이동하고, 오직 인편을 이용해 소통했다. 정치 지도자인 하니예가 사망하고, 신와르가 그의 자리까지 물려받자 하마스는 신와르에 의지하는 조직이 됐다. 이후 수개월간의 휴전 협상에서 그는 하마스측의 유일한 의사 결정권자였고, 협상은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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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정철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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